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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04. 2024

87학번

   지극히 사적이고 자의적인 평가일 테지만 91학번인 깎새에게 87학번은 여전히 우상이다. 신입생이던 1991년, 군 제대 후 복학을 이미 했거나 복학을 앞둔 87학번 선배들은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 다음으로 의젓한 성인으로 비춰졌다. 알을 깨고 나와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착각하듯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이라는 존재를 난생 처음 목도한 까닭이 컸겠지만 그보다는 84, 85, 86학번 복학생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불구하고 87학번만이 풍기는 특유의 이미지, 즉 같은 학번끼리 뭉쳤을 때 일으키는 유니크한 집단성과 개별적으로는 개성이 차고 넘치도록 독자적이면서도 왠지 끌리는 마초성이 그들답게 만드는 트레이드마크로 다른 학번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었다.(꼴에 남자랍시고 87학번 남자들만 띄우는 건 결코 아니다. 입학할 무렵 여자 87학번은 졸업을 해 거의 자취를 감춘 존재들이라 그들과 대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성별 다르다고 87학번 이미지가 어디 가겠는가. 함께 어울려 캠퍼스를 누렸을 그들도 87학번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학생이 드물다는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더니 남자 복학생들이 수두룩했는데 특히 87학번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압도적이었다. 머릿수가 받쳐 주니 추진력까지 셌다. 87학번 앞뒤 복학생들을 이끌어 학생회 행사를 주도해 나간 건 물론이고 그런 그들을 선망하던 깎새 같은 철부지 후배를 또 무심한 척 챙기기도 했다. 화수분이라도 가진 양 술자리 2차는 생맥주 대신 값나가는 OB 병맥주를 짝으로 시켜 먹는 그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공짜술깨나 얻어 마셨다. 그런 술자리라면 응당 등장하는 라떼화법은 아직 핏덩이나 다름없는 신입생에게는 천금보다 귀한 계시였고 그들 나이가 되면 그들처럼 의젓해지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랬다. 

   비단 학과 87학번만 동경의 대상이었던 건 아니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같은 대학교를 들어온 동문들로 이루어진 동아리 구성원들 중 87학번 복학생들은 유독 잘 뭉쳤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던 과목이 달랐던 문과생, 이과생들이 같은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곧장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게 쉽지 않지만 인문대생, 사회대생, 법대생, 자연대생, 공대생으로 따로 놀다가도 동아리에 모이기만 하면 그들은 일심동체로 변신했다. 그들 역시 무슨 일을 벌일라 치면 남들보다 끈끈한 결속과 응집으로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 덕에 안 될 것도 되게 만들었다. 최소한 대학교 교정 안에서만큼은 말이다. 특유의 마초성으로 인해 간혹 분위기를 험상궂게 몰아가기도 했지만 뒤끝 없는 깔끔함으로 원상 복귀시키는 데도 탁월했다. 공부는 등한시한 채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던 깎새 신입생은 학과 87학번, 동문 87학번들을 번차례로 졸졸 따라다니면서 공짜 술을 얻어 마시느라 다사다망이 더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1987년은 특별한 해다. 지난했지만 혁명적이었던 그해에 입학한 87학번들은 이른바 '87년 체제'로 불리워지는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와 변형의 기점 위에 서 있음을 직감했을지 모른다. 급격한 변화와 변형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고민이 깊었을 테고 집단지성이 어쩌면 가장 무난한 대응책일 거란 판단 하에 그들 스스로 똘똘 뭉쳤을지 모를 일이다. 구성원들 사이에서 협력하고 경쟁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영악함은 쪽수로만 밀어붙이는 양아치 조폭의 집단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깎새는 그 지점을 선망했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대오를 유지하는 기민함과 약삭빠름. 그 성질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훈훈한 인간미까지. 87학번과 어울리며 늙어가고 싶었다.

   지난 주말 부친상을 당한 동문 동아리 87학번 선배를 조문했다. 법대 출신인 선배는 깎새가 민락동에서 포장마차를 꾸리던 무렵 자주 찾아와 격려를 해줬고 법적 분쟁이 생겼을 때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마운 선배였다. 마침 87학번 사회대, 공대 선배가 먼저 와 있었다. 그 중 사회대 선배는 한 달에 한 번 깎새 점방을 찾는 단골이다. 얼마 안 있으니 일단의 87학번 선배들이 몰려왔다. 87학번 선배와 결혼해 해로하는 88학번 여자 선배까지 참석하니 조촐하게 동문회가 열린 성싶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썩어도 준치랬다. 대성한 자식들 결혼을 걱정하고 개구리마냥 툭 튀어나온 나잇살 배를 서러워하는 이들임에도 대화 속 싫지 않은 시니컬함은 녹슬지 않았고 OB 병맥주 대신 '고향집 식혜'나 '그리워예'를 마시며 논하는 세상사가 썩 기발할 것도 없음에도 특유의 마초성만은 구성졌다. 아직 먼 환갑을 언급하며 늙어감을 푸념하는 한 선배를 제지하며 깎새는 부르짖다시피 애원했다.

   "제발 그런 말 마이소, 행님!  아직 한창 아입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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