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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07. 2024

편지

   재미가 붙었는지 어제에 이어 우리 노래 한 곡 더 살펴보련다. 김광진이 만든 <편지>다. 살면서 많은 노래를 들어봤지만 기가 막힌 노래를 어설프게 부르는 가수로는 김광진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엉성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창법이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는 게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김광진 노래가 대체로 그러하고 <편지>가 대표적이지만 이 노래의 핵심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사에 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 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 두오

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 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가오


​   ​여자 가수가 절창을 한다 해도 노래 속 화자는 남자다. 지독시리 이성적이라서 오히려 더 구슬픈 여운을 자아내 꼭 예리하게 벼린 비수가 사람 속을 자비 없이 찔러대는 느낌이랄까. 여태껏 남자가 부르는 이별가로 이보다 더 절절한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별가라고 하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노래가 또 있다. 고려가요 <가시리>이다. 통상은 여자가 불렀으리라 짐작하지만 고종석 작가는 화자가 남자라고 주장했다. <편지>를 남자가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가시리>에서 찾을 수 있으니 시대를 관통하는 공감이라는 게 있긴 한가 보다.


​가시리 가시리잇고(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바리고 가시리잇고(버리고 가시렵니까)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나더러는 어찌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버리고 가시렵니까)


​잡사와 두어리마나난(붙잡아둘 일이지만)

선하면 아니 올셰라(시틋하면 아니 올세라)


​셜온 님 보내옵노니(설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난 듯 도셔 오쇼서(가시자마자 돌아서 오소서)


   빼어난 연애시들이 대개 이별의 시이듯이, <가시리>도 이별의 노래다. 통속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 시의 화자話者는 여자다. 이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애소哀訴와 원망과 설움과 체념 따위의 정조情調가 여성적 정서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해석일 것이다. 전투적인 여성해방운동가들에겐 이 시의 패배주의가 혐오스러울지도 모른다. 그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하자면, 나는 이 시의 화자가 남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애소와 원망과 설움과 체념 따위의 정조는 딱히 여성적인 정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랑의 정서다. 연애란 그런 것이다(『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8~20쪽에서)​


    노래를 들을 적마다 속으로 운다는 표현은 구태의연하지만 적확한 표현이다. 똥 누고 밑 안 닦은 것처럼, 떠나 보냈음에도 마음 후미진 데 똬리를 튼 심란함이 가실 길이 없는 건 이별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이겠다. 떠난 자는 잊었어도 떠나 보낸 자는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를 멍에처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별의 불합리를 간파했다면 진작에 이성적이었어야 했다. 사랑이 다 그렇듯 불가능하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KkvFvmNP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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