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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08. 2024

어떤 저녁 풍경

   돼지고기 값으로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선전 문구를 내걸고 손님을 유인하는 <깡다구>라는 상호를 단 점방이 왕복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깎새 점방과 마주보고 있다. 걷는 건 자유지만 점방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건 섭섭하다는 심보인 양 바깥에 붙여 놓은 메뉴판에는 갈비살, 안창살, 눈꽃살을 섞은 모듬세트 2~3인분은 삼만 구천 원, 3~4인분은 사만 구천 원이라고 쓰여져 있다. 가성비는 어떨까? 단골 중에 이 동네 먹거리는 거진 섭렵했다는 자칭 식도락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은 바가 있다. 그 양반 왈,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란다. 고기 맛은 어떤가 물었더니 손사랫짓이 요란한 게 박해도 너무 박한 품평이다. 2~3인분이 기본이라 혼자 들어가 먹기가 벅찬 데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물정까지 이미 들은 바라 다같이 고생하는 소상공인끼리 품앗이 차원에서라도 언젠간 매상을 올려줘야겠지만 그때가 언제일지 요원하다.

   아무튼, 술 파는 점방이 대개 그렇듯이 오후 느지막하게 문을 연다. 오후 서너 시께 열어 얼추 대여섯 시쯤 마수걸이를 하는 사이 깎새는 슬슬 마감을 준비한다. 며칠 전이었지 아마. 청소하는 중에 밤도둑마냥 슬그머니 들어온 손님 머리를 깎고 났더니 6시 반이었다. 불을 끄고 막 나가려는데 <깡다구> 앞에서 장정 세 명이 쪼로미 앉아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포착됐다. 아마 고기 굽고 술 마시다 떼로 몰려 나와 느긋하게 한 대 태우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려니 무심히 넘기면 그만일 헤식은 풍경에 그만 꽂혀 버린 깎새는 그들을 지그시 건너다보았다. 일과를 마친 저녁나절 마음 맞는 이들과 홀가분하게 걸치는 대폿잔의 흥취를 모를 리 없건만 그랬던 적이 언제였었나 아득하기만 하다. 낡아 빠진 영사기 속 빛 바랜 필름 돌 듯 과거 속 즐거운 어느 한 때를 애타게 찾느라 점방 문 닫는 것도 잊어 버린 깎새는 그들이 누리는 나른한 저녁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

   ​​한창 미드에 미쳐 있었을 때 봤던 《보스턴 리갈》이라는 드라마가 불쑥 떠오른다. 보스턴의 한 로펌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엮은 법률 드라마인데 정치 풍자에서 화장실 유머까지 코미디 요소가 여기저기에 깨알같이 박혀 있어 잔재미가 쏠쏠했었다. 여러 미드 가운데 유독 《보스턴 리갈》을 들먹이는 까닭은, 두 주인공인 앨런 쇼어와 데니 크레인이 어둠이 깔린 보스턴의 한 건물 발코니에서 위스키와 시가를 끼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에필로그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다.

   ​개성 강한 두 캐릭터가 보스턴 밤 풍경 아래에서 조촐한 여유를 누리며 예의 능청스런 말투로 다사다난했던 에피소드를 아퀴 짓는 모습이 허름한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단했던 하루를 갈무리 짓던 우리와 정서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아 정겨웠던 게다. 극적 재미를 극대화하려는 드라마 장치임을 감안한다 해도 썩 평범하지 않은 두 남자가 벌이는 왁자지껄을 꼭 한 번 따라 해 보고 싶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댔는데 죽이 맞는 파트너 하나 없는 깎새로서는 남들이 하면 쉬워 보이는 일도 한없이 버겁긴 하지만.

   ​임범 대중문화평론가는 오래 전 한 칼럼에서 ‘요시다 루이’라는 이름의 중년 아저씨가 도쿄 외곽의 술집을 찾아가서 술 마시고 나오는 게 끝인 15분짜리 케이블 TV 프로그램 《요시다 루이의 술집 방랑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처음엔 맹숭맹숭하던 프로그램이 한순간에 확 꽂힌 이유가 또한 정겹다. 다음은 그 대목이다. ​


   술집 여기저기서 단골들이 한마디씩 하는 게 들린다. 카운터 한구석의 어항에서 헤엄치는 금붕어의 등지느러미가 없다. 요시다가 묻는다. “얘 지느러미 어디 갔어요?” 저쪽에서 한 단골이 취기 어린 소리로 말한다. “여주인이 잘라서 태워 가지고 술에 담가 마셨지요.”(일본에선 생선 지느러미, ‘히레’를 태워 청주에 담근 ‘히레사케’를 마신다.) 다른 손님들도, 여주인도 웃는다. 그런 실없는 농담! ( <야! 한국사회-요시다 루이의 술집 방랑기>, 한겨레, 2018.01.16.)​


​   ​​꼭 불타는 금요일 저녁일 필요가 있나. 꼭 누룩내 진동하는 술판이 아니어도 된다. 해 질 녘 《보스턴 리갈》의 발코니 혹은 '요시다 루이의 술집' 같은 곳에서 고단했던 하루를 동무들과 조촐하지만 쌈박하게 마무리 짓는 저녁은 어쩌면 ‘저녁이 있는 삶’이라 부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른한 저녁을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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