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짜리 아포리즘을 오징어다리 씹듯 곱씹다 보면 오묘한 뭔가가 뒤통수를 냅다 갈긴다. '주석註釋'의 사전적 의미는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함, 또는 그런 글'이다. 주석은 또한 본문을 비평적으로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말을 누군가는 '삶을 쓰는 데 40년, 삶을 추억하는 데 30년'으로 들린다고 했지만, 주석이 본문에 대한 풀이일 뿐 변명이 아니라면 뒤 30쪽은 인생을 재해석하기 위한 역동적인 가동의 시기여야지 소극적 반추에 머물러서는 곤란할 게다. 주석을 써내려가는 중인 나나 당신이 매일매일을 살뜰히 여겨야 할 이유다.
쇼펜하우어 하면 우선 떠오르는 단어가 염세주의 혹은 니힐리즘(허무주의)이지만 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을 하는 계기로써 유용한 측면이 더 강하다. 작년 겨울 동안 인터넷 판매 1위를 차지했고, 지금도 목록 상위권을 유지하는 베스트셀러는 특이하게도 철학 교양서이고 신드롬의 중심에 쇼펜하우어가 있다. 바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강용수, 유노북스, 2023)이다.
서울여대 문성훈 교수는 최근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이 과거와 다른 점은 '자기계발'에서 '자기배려'로 트렌드 변화가 감지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기 배려’라는 말은 미셸 푸코의 용어로서 문자 그대로 우리가 각자 자신을 보살피고 돌보는 것을 말하며, 흔히 내가 나의 삶의 주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지,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 계발은 성공한 삶이라는 특정한 삶을 전제하고, 이에 필요한 능력 계발을 통해 이러한 삶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자기 계발에서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성공한 삶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문제 삼으며 자신을 배려하는 사람에게 삶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할 창작품과 같다.(<'자기계발'에서 '자기배려'로 베스트셀러가 달라진 이유>, 한겨레, 2024.06.13에서)
민주화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신자유주의 시대를 초래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일어난 일대 전환기였던 1980~199년대에 출생한 3040세대가 책의 주 독자층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 결과 우리는 독재정권 치하의 권위주의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의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모든 사회 영역이 이윤 극대화 논리에 따라 재편됨으로써 무한경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는 겉보기에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사회가 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 성공 척도에 맞게 자신을 계발해야 하는 철저한 자기관리 시대가 되었다.
(...)
사실 무한경쟁은 이미 승패가 정해진 싸움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가 자녀의 경쟁력이 된 사회에서 경쟁이란 능력과 업적에 따라 사회적 재화가 분배되는 정의로운 절차라기보다, 기득권이 ‘정당하게’ 세습되는 기만 장치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없다.
3040세대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경험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무엇 때문에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되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인생을 허망하게 보냈는지 자조하는 것은 아닐까?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도 그렇다. 과연 이들은 이른바 성공한 삶이 진정 자신이 원하던 삶이라고 느낄까? 아니면 마음속으로는 부모, 아니면 사회가 강요한 삶이라고 느낄까? 만약 후자라면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허무주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위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