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부사가 주는 효용은 대단하다. 부사 하나가 한 문장 전부를 에워쌀 수 있다. 에워쌈이란 곧 입김인데 어떤 문장을 써서 표현하려는 바를 알토란 같은 부사 하나로 모두 드러낼 수 있다. 비단 문장뿐이랴. 시인이 애면글면 지은 시 한 수가 부사로 간파당할 수 있다.
쫄딱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담너머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잠깐 사이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환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반갑고 당당할 줄이야
계집아이가 '쫄딱'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시는 완전히 독해되었다. 이 얼마나 강하면서 기특한 단어인가. 그런 단어 예는 많다.
* 김은 에멜무지로 갈았던 김칫거리가 때를 잘 타 이달은 벌이가 괜찮았다. (이문구)
: 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 하는 모양
* 농군들은 우수, 경칩, 춘분, 청명-이렇게 풀풀 날아들어도 봄보리 때가 어느 땐지도 모르고 엄벙뗑 보내다가 떡 한식이 닥쳐야만 비로소, “어이쿠!” 하는 것이 보통이다.(이무영)
: 어떤 상황을 얼김에 슬쩍 넘기는 모양
* 상경할 때마다 구메구메 양식이랑 잡곡이랑 먹을 걸 날랐다.(박완서)
: 남모르게 틈틈이
부사 모으는 재미가 솔찮다. 모은 게 술술 나오면 더 재밌겠지만. 부사를 자유자재로 적재적소에 구사해서 문장을 맛깔나고도 풍성하게 지을 수 있다면 열 문호 안 부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