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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l 12. 2024

'너무'가 쏘아 올린 고유한 개인

   '너무'가 '정말'을 집어삼킨 언어 현실에 익숙해지긴 참 어렵다. '너무'가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넘어선 상태'를 뜻하는 부사로 부정적으로 쓰이는 반면, '정말' 쓰임새가 부사일 때는 '거짓이 없는 말 그대로'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나타냄으로써 음식 맛이 좋거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하다면 '정말 맛있다', '정말 행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게 말이 뜻하는 바와 부합한 쓰임새라고 볼 수 있다. 설령 '너무 맛있다'나 '너무 행복하다'가 문맥이 안 닿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듣기에 어색하고 왠지 작위적인 냄새까지 나서 되우 꺼린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TV, 영화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에서 '정말'이라 쓰일 자리에 '너무'가 슬쩍 퍼질러 앉아 주인 행세를 하면서 그 범위를 확장시키더니 요새는 '정말'을 정말로 듣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다.

   언중들이 쓰는 데 따라 그 의미가 변하고 표기법도 변하는 언어의 사회성 측면에서 본다면 '너무'의 변신에 선악, 호오란 가치 판단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정말' 대신 '너무'가 언중들한테 더 그럴듯하게 느껴져 빈번하게 사용하는 거면 '너무'는 언어의 사회성을 이미 획득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자리라면 긍정적인 의미로써 '정말'을 불러내려는 고집을 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이는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역설한 언어의 층위에서 '고유한 개인'이 되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듣자 듣자 하니 너무 재수가 없는가?  

   신형철은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도 생겨난다면서 신선한 어휘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독창적인 표현을 만들어보려 애쓰는 것은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성의의 문제에 더 가깝다고 문학평론가답게 일갈했다. 그러면서 잘 알려진 사례 하나를 가져오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의 숲』(1987)에 나오는 대화다.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나?"

   "봄날의 곰만큼."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말을 건네지.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널 좋아해."


   '너무'라는 간편하고도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 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성의라면 감동받을 만한 것이라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클리셰(상투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도 했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358~360쪽 발췌) '너무 맛있다'고 남발하는 먹방이 오히려 신뢰가 잘 안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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