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대표는 고전 중이다. 어쩌면 송곳으로 고막을 찌르는 듯한 ‘악전고투’란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안타깝게도. 20대 중반 유통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로 근 사반세기를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 바닥에서만 뒹굴었다. 그간 경험을 밑천 삼아 월급쟁이를 막살하고 사업자로 나선 게 최근의 일이다. 아주 넉넉하지는 못해도 나라 밖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던 처자식 뒷바라지할 형편은 되었지만 요즘엔 계산기를 몇 번씩 두드리고 나서야 어렵사리 송금하는 실정이다.
작년 여름 그가 부산 내려왔을 때보다 올봄 내가 서울 가서 그를 만났을 때 들었던 근황이 더 열악했다. 특히 연초에 창궐한 역병은 이 앓는 놈 뺨을 치듯 사업 기반이 아직 취약한 그에게는 치명적이었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몰렸다.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담담했다. 회사 자금이 달려 아쉬운 소리를 늘 입에 달고 살고 바닥을 기는 매출을 올려보려고 갖은 방법을 물색하느라 노심초사하는 건 이제나저제나 매한가지지만 호빵맨 같이 후하게 생긴 얼굴은 전보다 더 해맑았다. 초탈했거나 포기했거나. 그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극단적인 두 생각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한편으로는 한 기수 아래인 후배 앞에서 돼먹지 않은 가오나 일삼는 건 아닌지 적잖이 의심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알고 지낸 그가 그따위 객쩍은 허세나 부릴 위인이 아님을 아는 나로서는 험난한 고난의 행군 중에도 그가 쓰러지지 않는 그 무엇이 분명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역경에 굴하지 않으며 우직하게 제 갈 길을 가도록 그를 지탱하는 그 무엇이 그래서 몹시 궁금했다. 만약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나는 황 대표를 내 만인보에 꼭 기록해서 두고두고 귀감으로 삼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끌기 싫어서 불쑥 그에게 물었다. 번다한 마음에 무거운 짐 하나 더 얹는 듯해 미안했지만 내 물음에 꼭 대답하라며 하여튼지 물었다. 당신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 예수님을 보면서 물 위를 걸어가는 베드로의 발이 출렁이는 호수에 막 닿는 순간을 표현하는 문구로 독일어 Auf dem Wasser(물 위에)가 있단다. 늘그막에 사업을 시작한다는 건 물 위를 걷듯 기적을 바라는 건지도 몰라. 그러니 혹시 물에 빠질까 늘 무섭고 두려웠던 게 사실이고. 마치 아래를 보다가 물에 빠졌던 베드로처럼 물에 안 빠지려고만, 앞만 보고 가려고만 했던 지난날이었어. 하지만 물 위를 걷는 게 결코 쉽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님을 사업이 횡보를 거듭할수록 깨닫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이제는 빠져도 괜찮다, 몸에 물이 좀 젖어도 괜찮다, 어차피 손잡아 주실 것인데, 그래서 다시 물 위를 걸을 것인데 하며 마음 편하게 먹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바라기보다 바지 걷어붙이고 세찬 물길에 맞서 당당하게 헤쳐 나가겠다는 오연한 기풍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신봉하는 종교의 힘과 마음보 저 밑바닥에 내재된 강인함이 결합해 그를 견실한 구도자로까지 보이게 한다.
다라운 고백이라면서 무좀은 그의 오래된 친구란다. 찰거머리 같은 녀석을 떼어내려고 온갖 모진 짓을 다해봤지만 소나기는 피하고 보겠다는 심산인지 그때만 슬쩍 사라졌다가는 이내 어김없이 또 나타난다. 누군가(뭔가)를 독하게 원망하면 속상한 마음에 위로가 되긴 한다. 허나 쾌감은 아주 찰나이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게다가 원망을 당해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상대와 재회하지 말란 법도 없다. 내성으로 재무장한 무좀을 대하듯 말이다. 감정의 골은 깊어지는데 그걸 도외시한다면 서로가 입은 마음의 내상만 더욱 곪아질 뿐이니, 원망한들 바뀌는 것도 없으면서 원망하느라 시간만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원망을 그냥 꿀꺽 삼키기로 했단다.
No time to be sad.
그가 세상에 던진 처세의 기술이다. 그러고 보니 어디 먼 데 여행을 떠난 양 한 이 년 잠잠하던 무좀이 다시 도졌나 보다. 짜식, 반갑다! 대신 오래는 말고 딱 일주일만 나한테 묵다 가라.
형, 안 힘들어요? 내가 물었다. 힘들지. 근데 내 눈엔 형이 왜 안 힘들어 보이죠? 그럼 울고 다닐까? 우문현답이 따로 없다. 황 대표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