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Aug 02. 2024

가까운 거리라고 감정까지 가깝진 않다

   에드워드 홀이라는 미국 인류학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이렇게 나눴다. 

   

   첫째, 친밀한 거리. 46cm 이내의 거리로 연인이나 가족에게만 허용하는 거리. 

   둘째, 개인적 거리는 46cm에서 1.2m 사이로 친구나 동료 등 잘 아는 사람끼리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

   셋째, 사회적 거리로 1.2m에서 3.6m 사이에서 사무적 관계로 만나는 사람과의 거리. 

   넷째, 공적인 거리. 3.6m에서 7.6m 사이로 위협을 받을 경우 피할 수 있는 거리. 목소리는 커지고 몸짓 등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으로 의사가 전달된다. 무대와 관객의 거리이기도 하고 연설 등이 진행되는 거리이다.

   

   머리를 깎자면 생면부지라도 46㎝ 이상 떨어져선 안 된다. 팔이 짧은 관계로 커트 작업에 애를 먹는다. 하여 깎새는 지금 하고 있는 밥벌이를 때려치우지 않는 한 손님과 친밀한 거리를 늘 유지해야 하는 숙명이다. 그러니 깎새는 손님과 거의 식구 수준으로 교감할 절호의 기회가 상존한다. 하지만 너무 순진하게 접근해선 곤란하다. 사람 사이 거리가 가깝다고 사람 감정의 거리까지 허물 없진 않을 테니. 

   혹자는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일상 속 만남조차 전인격적인 만남(김용석)이라고 했다. 여기서 전인격적인 만남이란 무얼 의미할까. 자기의 모든 인격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의 만남, 즉 희노애락을 다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로 규정하지만 깎새가 겪은 바로는 모든 관계가 꼭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점방엘 드나드는 손님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고 어느새 공감대의 저변이 넓어져 그것으로 전인격적인 만남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여기면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손님은 오로지 머리를 깎는다는 목적성에 충실할 뿐 다른 어떤 것에 관심도 의미도 두지 않으니까. 하소연하듯 쏟아내는 사연이란 건 그저 심심해서 떠벌이는 요설일 뿐, 설령 강한 호소력으로 동병상련을 부추긴다 한들 속 빈 강정이기 십상이라 거기에 홀딱 넘어가다간 바보 취급 당하기 딱이다. 고로 그간 깎새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바보였던 셈이다. 

   심심하던 차에 시간이나 죽이겠다며 털었을 수다는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허공에 산산이 부서졌을 테지만 마치 재활용하듯 그 말들의 조각을 그러모아 깁고 박아 삽화 한 꼭지로 재생시킨다고 당사자가 뿌듯해할까. 자기에 대해 왜곡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당장 게시글을 삭제하라는 손님 항의 댓글을 접했을 때, 타인의 치부나 후비적거려서 가십거리로 삼을 속셈이 아니라 사연 속 굴곡에서 깨닫는 바 있어 기록으로 남겨 스스로 삼가는 유익한 거름으로 삼으려는 선의라고 항변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이치는 간단하다. 내가 너를 모르듯 너도 나를 모르면서 아는 체 나대는 게 합당한 처사냐 불편해하면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 홀이 나눴다는 사람 사이의 거리라는 게 공간적 원근감에 상응하는 사람 사이 교감의 밀도임을 모르지 않는다면 깎새는 그간 손님을 지나치게 낙관적 존재로 오인했거나 세상을 너무 무드 있게만 본 우를 범한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점방 드나드는 손님들이 흘리는 감정의 쓰레기를 매일 끼적이는 글의 재료랍시고 줍는 짓은 지양하려 한다. 꼭 써야겠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는지, 있다면 합당한지, 거부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사실에 부합할 자신이 있는지부터 진지하게 고민하는 수순을 밟겠다. 못 쓰겠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지만 솔직히 김이 다 샜다.

작가의 이전글 캐리어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