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Aug 22. 2024

대못 박힌 가슴이 아파오는 시

   1991년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더니 정호승이라는 시인을 모르면 학과생 취급을 안 하더라구. 당시 민음사에서 나온 시선집 『서울의 예수』는 시 좀 읊조린다는 동기들 사이에서는 필독서였다. 종교적 경건함에서 기인한 시어는 어수선하던 시대 방황하던 청춘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따뜻했다. 시에 별로 흥미를 못 느꼈지만 정호승 시집은 유독 직접 사서 다 훑어볼 만큼 딴엔 정성을 들인 기억이 생생하다. 「또 기다리는 편지」라는 시에 특히 자주 눈길이 머무르면 괜히 설레다가 막 아리기 일쑤였다. 대학 시절 애송시로 주저없이 그 시를 고르는 까닭이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시에 등장하는 '기다림'이란 단어에 자주 울컥했다. 겨우 스무 해 남짓 산 숫보기 인생이 굴곡 져봐야 얼마나 졌을 거며 사랑을 알면 또 얼마나 알았겠는가. 그럼에도 사랑하기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했다는 구절이 사무치다 못해 마음이 찢어지듯 아려 오던지. 새삼스레 시 구절을 곱씹으면 '기다림'이 주는 미완의 행복감을 아주 조금 이해가 가면서도 아린 건 여전히 어쩌지를 못한다. 

   정호승 시집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 대학 4학년 무렵이었다.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고 그 실연의 아픔으로 시름시름하던 꼴을 못 보겠던지 친구(누군지 기억이 전혀 안 나는)가 2학년짜리 여학생을 소개시켜 줬다. 썸을 탈락말락 하려던 차에 마침 여자애 생일이라고 해서 준비했던 선물이 『서울의 예수』 시집이었다. 

   만나기로 한 날 여자애를 소개해 준 친구가 느닷없이 여자애 대신 이별을 통보했다. 기껏 두어 번 만나 차 마신 게 다였으니 이별 통보라는 표현이 멋쩍긴 하지만 2년 동안 사귀던 여자한테 단박에 차인 것보다 더 기분은 다라웠다. 게다가 뒤에 밝혀진 여자애의 행각은 가슴에 대못을 박은 꼴이었다. 원래 사귀던 남자가 있었는데 살짝 틀어지는 바람에 홧김에 소개팅 자리에 나와서 딴 남자를 설레게 만들었으니. 그러다 화해를 해 둘 사이가 원상복귀되자 그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젊은 날 같잖은 사연들이 쌓이고 쌓여 '기다림'이란 정서의 지평을 넓히는 거라 자위하고 말 일이긴 하나 오래도록 뒤끝은 개운치가 않다.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작가의 이전글 유머와 위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