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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ug 28. 2024

사랑의 발명

   시詩가 좋아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를 비평하는 평론에 푹 빠진 계기가 된 시와 시평이 있다. 시도 시지만 꿈보다 해몽이랬다고 시를 평하는 시평이 미문美文이면 빠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사람의 감정을 옴짝달싹 못 하게 콱 틀어지는 글을 쓰는 이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그의 재능을 닮은 단 한 줄이라도 끼적일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여한이 없겠다.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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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왜 그는 다른 길을 두고 하필 구덩이를 파고 누워 곡기를 끊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일까. 나는 제 무덤을 파고 산 채로 들어가 서서히 굶어죽어가는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상상해본다.  어렸을 때 '자신을 죽이다kill myself'라는 영어 표현의 강력한 실감에 놀란 적이 있는데('자살'이라는 말은 'suicide'가 그렇듯이 내게는 관념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보고 누워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일. 이 죽음은 신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관객을 염두에 둔 최후의 저항처럼 보인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 때 인간이 무책임한 신을 모독할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그것이지 않은가.

   화자에게 그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이라도 그럴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이 "나라도 곁에 없으면"에 대해 생각한다. 무심코 저런 속엣말을 하고 스스로 놀라버렸을지 모를 한 사람을 생각한다. 내 앞에서 엉망으로 취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라도 곁에 없으면 죽을 사람'이라는 말을 '내가 곁에 있으면 살 사람'이라는 말로 조용히 바꿔보았을 한 사람. 이런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을 계속 살게 하고 싶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에는 한 인간에 의해 사랑이 발명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동정이 아닌가? 사랑과 동정을 혼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우리는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가?

   사랑과 동정이 같다고 주장한 사람 중에 쇼펜하우어가 있고, 그 둘을 혼동하지 말라고 한 사람 중에 막스 셸러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의지'라고 했다. 생명이 가진 무분별한 욕망 에너지를 그는 '의지'라고 부른다. 의지는 맹목적이고, 그래서 삶은 고통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나와 네가 근원적으로 닮았음을 발견하는 때, 고유한 '나'는 없고 다만 아픈 '우리'가 있을 뿐임을 깨닫는 때가 있는데, 그때의 감정을 '동정Mitleid, 연민'이라 한다면, '사랑'이 그것도 다른 것일 수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연민이다."(67절) 물론 "참되고 순수한 사랑"만이 그렇다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아니라고, 막스 셰러는 말한다. 한국어로는 '동정'이라 옮겨져 왔지만 실은 그것보다 큰 개념인 심퍼시sympathy, 동감에 대한 책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1장 4절)에서 그는 주장한다. 쇼펜하우어식의 동정은 고통의 보편성을 인식하면서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사건인데, 이는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흔한 말이 무색하게도 고통의 양이 두 배가 되는 결과에 이를 뿐이며,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사랑은 어떤 도덕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자발적 작용이기 때문에, 몰가치적이고 반작용적인 동정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사랑 속에 동정이 포함될 수는 있어도 동정이 사랑으로 도약할 수는 없다는 것.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진실이다. 그러나 나의 진실은 아니다. 사랑은 세상이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사랑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나의 진실은 다음 문장에 있다. "Amo: Volo ut sis."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에 적힌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훗날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9장 2절)에서 다시 적은 그 말.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이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너는 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모 볼로 우트 시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

   이런 맥락에서 나는 사랑과 동정이 깊은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요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이라면 말이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쓰러워 그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마음에 어떤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나. 가브리엘 마르셀은 말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존재의 신비 2』) 이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 역시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다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난다, 9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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