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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Sep 12. 2024

후회없는 학창 시절을 위하여

   여유있게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는 것까지는 좋았다. 미리미리 채비를 해서 늦지 않게 당도할 테니 마음이 가뿐했으니까. 학교까지 절반쯤 와서야 단복을 안 입었단 걸 알아챘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맞은편 정류장에 갔더니 중년 여성 무리가 서로 먼저 버스를 타려고 멱살잡이를 하니 난리도 아니었다. 버스 기사가 그들을 뜯어 말리느라 버스가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절망하던 차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 번호가 아님을 알고 크게 안도했다. 이를테면 17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16번 버스였다. 크게 안도하던 찰나 잠이 깼다.

   레퍼토리가 엇비슷한 꿈 속에서 늘 대학생으로 등장한다. 이번에는 4학년 졸업반인 ROTC 후보생. 학교에서 5시 약속이 있어서 나왔다가 6시 군사학 강의를 깜빡하고 ROTC 단복을 입지 않아 당황해한다. 5시 볼일을 본 후 다시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6시 강의실로 입장하자면 시간이 빠듯해 중간쯤에서 내려 집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그만 사달이 났다는 게 꿈의 전말이다.

   대학생으로 등장할 적마다 어김없이 곤경에 처한다. 졸업 학점이 모자라 ROTC 소위 임관이 물 건너 가거나 시험이 코앞인데 도서관 자리를 못 구해 몰래 열람실로 들어갔다가 사서인지 선배인지 책 안 볼 거면 나가라면서 내쫓기는 처지는 불운의 아이콘 그 자체다. 그에 비해 불운을 막을, 촉박하나마, 1시간 가량 여유를 번 꿈은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보여 나은 편이다.

   졸업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곤경에 처한 대학생으로 꿈 속을 헤매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맺힌 게 분명하다. 천금같은 대학생활을 허송세월로 탕진한 방종을 두고두고 자책하는 데서 기인한 바 크겠으나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구나 소망, 갈등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꿈'이라고 한다면 대학교가 배경인 꿈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 꿈 배경으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까닭이 그 시절 기억만 유독 무의식에서 철저하고도 말끔하게 표백되어서다. 철저하고도 말끔하다는 건 그 시절과 절연했음을 뜻한다. 꿈 속에서 단역으로조차 등장하지 않을 만큼 별 볼 일 없었던 한때. 그와는 대조적으로 대학교 시절이 꿈으로 표상된다는 건 아직도 거대한 미련으로 남아 기억 속 똬리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련이라, 무엇이 그리 박혀 이다지도 마음을 들쑤시는 것인가. 그 정체를 탐색하러 심리의 바다를 유영하는 게 남은 숙제다.

   1학기 성적이 좋은 덕을 봐서인지 큰딸은 2학기엔 기숙사 생활을 한다. 금정구 장전동에서 해운대구 좌동까지 등하교하는 시간에 어떤 뻘짓을 해도 그보다는 생산적일 텐데 참 다행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기숙사란 곳을 경험하지 못한 아비는 큰딸이 몹시 부럽다. 기숙사 문을 나서자마자 곧장 학교인 건 또 어떻고. 여건을 모두 갖추고 공부에 매진하는 기분은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모든 게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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