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를 픽업해 해운대 방면으로 귀가하자면 서면교차로에서 양정으로 가는 중앙대로를 타야 한다. 서쪽으로부터 엄습한 어스름이 사위를 점점 집어삼키려던 며칠 전 오후 6시30분 경, 서면교차로 정지선 맨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릭 사티 <짐노페디 1번>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풍경을 지배하는 배경음을 자처했다.
신호가 바뀌자 버스 전용 차로로 범내골 방향에서 가야대로로 향하는 시내버스가 행렬을 이뤄 넘어오고 있었다. 68번, 138번, 67번. 버스 안은 하나같이 승객들로 빽빽했고 마치 성냥개비들로 꽉 찬 성낭갑들이 줄을 지어 지나가는 줄 알았다.
에릭 사티는 <짐노페디 1번> 지시어로 '느리고 고통스럽게'(Lent et Douloureux)를 택했다. 성냥갑은 교차로를 느리게 선회했고 그 속에 든 성냥개비들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날 라디오 선곡은 탁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