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한산해진 틈을 노려 점방을 독점한 손님은 커트에 염색까지 주문했다.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한 인상이니 단골은 아닐 터. 흑색을 타서 부지런히 바르고 있는데 뜬금없이 자식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명절 앞이라 가족을 화젯거리 삼아 덕담 생색을 내려는 속셈임을 모를 리 없다.
- 딸 둘입니다.
- 큰 애는 몇 살?
- 휴학 두 번 한 대학교 3학년입니다.
- 작은 애는?
- 고2 됐습니다.
앞거울에 비친 깎새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 올해 몇 살인교?
- 쥐띱니다.
- 그래서 몇 살이냐고요?
- 72년생입니다.
- 쉰셋이우?
- 생일 지났으니 만으로 쉰둘인데요.
괜히 불퉁거렸더니 손님이,
- 마스크 때문인가. 나는 암만 봐도 마흔 두셋으로밖엔 안 보이는데.
손님이 올 낌새면 제일 먼저 마스크부터 쓰는 버릇이 이런 식으로 빛을 발하다니. 아무튼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열두 마리 동물 중 하나를 대거나(쥐띱니다) 그 동물을 생년에다 붙여 대충 얼버무린다.(72년 쥐띱니다) 손님이 실제 나이를 실토하지 않는 한 단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겠단 집요한 근성의 소유자라면 마지못해 세는나이 말고 만 나이로 대답한다.(2023년 세는나이는 사라지고 만 나이로 통일되었다지만 한 살 먹고 세는 버릇은 여전하더라)
처음부터 나이 밝히는 것에 유난을 떨진 않았다. 무슨 대수라고. 청춘 그 마지막 빛이 사위어 가던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 깔딱고개를 넘어갈 때도, 삼십 대 때 쳤던 분탕을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사십 대에도 나이란 스스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영역, 저 무정한 세월 흘러가는 대로 그저 바라만 볼 뿐이라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로 일관했을 뿐이다.
헌데, 속절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과연 단 한 번이라도 여한없이 누려본 적이 있었냐는 자문에 묵묵부답이고 마는 것엔 안타깝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빈털터리 주머니 사정이 본질은 아니다. 돈이 없어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하지 못한다는 핑계는 숙명적인 합리성으로 일견 납득이 갈 만하면서도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는 생리적 욕구가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는 본말전도된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지루한가.
그렇다고 깎새 짓을 그만둘 수는 없다. 의식주 해결에 필요한 유일무이한 방책이기도 하거니와 기본적이고 규칙적인 경제 활동은 사람의 생체 리듬을 늘 정正의 상태로 유지시키는 까닭에 가급적 오래오래 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소견이다. 지나친 물욕을 일단 버려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일상을 어떻게 영위할지 고유한 원칙이 서게 된다. 즉, 엄격하게 정한 데드라인 안에서만 경제 활동을 하고 말 것. 그러자면 출퇴근 시간은 칼 같아야 하고 웃돈 유혹이 들어와도 오버 타임이란 결코 없을 것.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 말고 나머지는 본캐 못지않은 부캐를 위해 애살을 떨 것.
부연하자면 이렇다. 하루 스물네 시간, 한 달 삼십 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중에 일에 투자하는 시간을 뺀 나머지는 온전히 내 것이다. 일하는 시간의 경계를 확실하게 지으면 남는 시간이 얼마인지 쉽게 계산이 된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면서 맹렬하게 즐길 것인가가 중요한 화두다. 제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찾기, 이 얼마나 행복한 탐색인가!
『시마』 시리즈, 『황혼유성군』 시리즈로 유명한 만화가 히로카네 켄시(1947년 생)는 그가 오십 대쯤인 2000년대 초반에 『중년이 행복해지는 여섯가지 비결』(2003, 나들목)이라는 에세이집을 냈는데 오십 줄부터가 새로 시작하는 반의 인생, 곧 '후반생'이 행복해지기 위해 오십 대 때 결심할 여섯 가지를 남겼다. 요점만 밝히자면,
첫 번째, '작은 욕심'을 부린다. 살아가기에 필요한 의식주는 이미 충분히 갖추었기에 큰 욕심은 필요하지 않다.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을 천천히 음미하자.
두 번째, 좋지 않은 과거는 깨끗하게 잊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을 정말로 즐거운 때라고 생각하려면 과거 따위는 산뜻하게 잊는 것이 좋다.
세 번째, 즐거운 것은 '진심으로' 즐긴다.
네 번째, 방황하고 있다면 한 발짝 앞으로 나간다. 지금까지는 자주 방황하는 인생이었다. 그 이유는 내 이익과 안전을 우선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저울질했기 때문이다. 잃는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던 우리는 후반생에는 잃어버릴 염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섯 번째, 그 존재가 혈육이어도 좋고 타인이어도 좋으니, 자신만 아니면 누구든,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존재를 마음에 둔다.
여섯 번째, 후반생이 행복해지려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대범하고 느긋한 체념이 있어야 한다.
친구 한 녀석이 명절 인사를 남겼다. 우리가 인생을 지금보다 더 효율적으로 즐기자면 무엇보다 우선 안 아파야 하니 건강, 건강, 또 건강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뻔한 덕담에 꽂혀 괴발개발 참 많이도 끼적거렸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은 철바늘을 꽂아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금강불괴의 건강을 유지하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