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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Sep 23. 2024

대학가 노포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온 가족이 나들이갔다. 큰딸을 기숙사에 데려다준다는 명분으로 범어사라는 큰 사찰로 행차한 게다. 경내를 한 바퀴 휘휘 둘러보고 났더니 시장기가 돌아 얼마 안 떨어진 큰딸 대학가로 직행했다. 먹거리는 역시 대학가니까. 대학교 전철역 공용주차장에 차를 박아 놓고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거기는 아비가 좀 안다. 허랑방탕하게 싸돌아다니던 30여 년 전과는 물론 전혀 다른 곳으로 변모했지만. 뽕나무밭이 바다로 바뀌어도 수태 바뀌었을 테니.

   이왕 왔으니 가족하고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다른 데는 다 바뀌었어도 한 자리에서 3대째 이어지는 산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 곳에서 뜻깊은 한 끼를 때우면서 아비에서 큰딸로 이어지는 동문의 전통을 한껏 치켜세우려는 꿍꿍이였다. 하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추석 연휴 늦더위는 그날 정점을 찍었고 아침을 일찍 먹은 탓에 내내 배를 곯아 신경이 예민해진 마누라 성화로 결국 고구마 토핑에 치즈가 잔뜩 들어간 떡볶이나 씹으면서 그날 일정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보다 더 경악을 금치 못했던 건 큰딸의 무지였다. 

   - 아빠는 선지국밥이 최고더라, <비봉식당>에서.

   - 거기가 어딘데?

   - ···?

   부산대학교 앞에는 <비봉식당>이라는 유서 깊은 돼지국밥집이 있다. 할머니에서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오래된 노포는 거기 국밥은 안 먹어 봤어도 비봉이란 상호는 그 학교 출신이면 꽤나 살갑게 다가오는 것이다.(그러니 난생 처음 듣는 듯한 큰딸 반응에 충격이 얼마나 컸겠냐구.) 

   아비가 재학생일 무렵 동아리 아지트로 뻔질나게 드나들던 선술집인 <잔치집> 가는 길에 <비봉식당>이 있었다. 하여 1991년 신입생 시절부터 졸업할 때까지 간판만 보면 궁금했다. '비봉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혹시 날아다닐 비飛와 봉황새 봉鳳의 조합? 그렇다면 '날아다니던 봉황이 잠시 쉬어가는 그야말로 상서로움이 깃든 돼지국밥집'이란 의미일까? 혹은 풍수지리에 의하면, 봉황이 날개를 펼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형세의 명당을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라고 부르는가 본데 사업 번창의 명당을 바라는 의미에서 비봉이라 지었을까? 꿈보다 해몽이랬다고 식당 주인이 들으면 좋아라 했겠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랴, 돼지국밥집은 3대째 순항 중이면 됐지. 그러면서도 이 대목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1946년 이래로 새벽벌(효원) 일대를 주름잡는 독수리(부산대 상징 동물) 옆에서 곁다리로 꼬붕짓하던 봉황이 롱런한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 

   부담없이 한 끼 때우는 서민음식이라고 하기엔 부담스러워진 요즘 돼지국밥 가격이다. 짜장면도 비싸지긴 마찬가지지만 1만 원에 육박하는 돼지국밥 값에 비하면 아직은 얌전한 축이다. 그럼에도 비봉에선 올랐다고 해도 7천 원이란다. 주머니 사정 뻔한 학생들 입장에서 7천 원짜리 돼지국밥은 배 부르고 등 따순 가성비 갑인 음식이다.

   재학생 시절, 숙취 전문 해소처로 각광받은 곳이기도 했다. 작취미성昨醉未醒인 몸뚱아리를 달래기에 당시 5백 원 하던 교내 학생식당인 문창회관 소고기국밥만으로는 역부족이면 비봉은 은혜로웠다. 그 어떤 해장국보다 말끔하게 영혼을 정화시키는 육수와 비할 데 없이 푸짐했던 국밥속이면 그날 또다시 만취의 전선으로 재출정한대도 끄떡없을 충전과 위안이있으니. 그렇게 그때 그 시절 청춘은 <비봉식당> 돼지국밥으로 각인되었다. 

   예나 이제나 주인장 싹싹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지만 무탈하게 대대로 이어지는 걸 보면 손님맞이 기술 좋다고 꼭 장사 잘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데면데면한 주인장 면상을 보면서 퍼먹는 돼지국밥의 풍미를 가족들이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 되었다. 뭐 그래도 괘안타. 큰딸이 거기 기숙사에서 어디 안 갈 테니. 다른 날 다른 명분 구해서 또 거기 대학가 어슬렁거리다가 들르면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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