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가 기고한 한 일간지 칼럼에서 알게 된 일본 드라마 <철도 오타쿠 미치코, 2만킬로>는 분명 흥미를 자극했다. 꼭 보고 싶다.
가구회사 영업담당인 미치코는 휴일이면 기차를 타고 일본 전역의 외딴 기차역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철도여행 관련 잡지에 YUI라는 필명으로 가끔 기고한다. 미치코가 여행을 가는 곳은, 역에 내려 풍경을 보면서 '여기가 어디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낯설고 한적한 지역이다. 하루에 내리는 승객이 평균 세 명이라거나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곳.' 잡지 편집장이 전화로 "거기 뭐가 있나요?"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없어요. 최고입니다." 그러나 미치코는 단지 그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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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 패널, 무인역, 댐 카드, 열차 소리, 아주머니들의 수다, 은퇴한 레일, 아직 어린 차량,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는 사람이 멋대로 정해놓은 것.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기. 누군가에게 방해되는 것이라도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김봉석의 문화유랑-아무것도 없는 풍경의 아름다움>, 경향신문, 2024.08.30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다. 아사다 지로 단편소설 「철도원」은 회한 많은 철도원 이야기다. 하얀 눈이 뒤덮인 홋카이도 시골 마을 종착역. 홋카이도 도시와 시골을 잇는 지선은 폐선이 결정됐고 늙은 철도원 역시 정년을 앞두고 있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딸을 잃고 그 충격으로 아내마저 세상을 뜰 때도 태연하게 역을 지킨 그였지만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홋카이도의 눈발처럼 한없다.
곧 초등학생이 된다는 낯선 여자아이, 그 애가 놓고 간 인형을 찾으러 왔다는 곧 중학생이 된다는 아이 언니, 그날 밤 두 아이의 맏언니라며 여동생들을 잘 대해 준 걸 감사해하는 소녀가 차례로 철도원을 찾아오자 그는 '눈의 아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준 유키코의 혼령임을 알아챈다. 유키코는 자기가 살아있었다면 성장했을 지난 17년간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 드려 가족의 그리움을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첫차가 오기 전 눈덮인 선로를 쓸며 도착한 제설차가 플랫폼에 제복 차림으로 깃발을 든 채 눈밭 위에 쓰러져 죽은 철도원을 발견한다.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철도원>은 소설의 서정적이면서 환상적인 면을 극대화했다. 소설이든 영화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제 슬픔을 삭이면서까지 찾는 사람 별로 없는 지선의 종착역을 끝까지 지키는 철도원의 고지식함이었다. 도시와 시골을 이어주는 지선이 폐선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철도원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건 덜 편해도 오래되어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경의가 아니었을지.
모든 걸 속도와 편리, 잇속으로 재단하는 시대로 변질됐지만 세상 풍경을 세밀화로 보고 싶어하는 누군가는 아직 있다. 「철도원」 속 늙은 역장처럼 누군가는 나뭇잎의 색깔과 공기의 온도와 바람의 냄새를 모조리 다 기억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철도 오타쿠 미치코, 2만킬로>가 가슴에 콕 박힌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