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향했던 14호 태풍 풀라산이 열대저기압으로 약해진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편서풍을 타고 유턴을 하더니 가을장마 전선과 잘못된 만남이 이뤄졌다. 그길로 한반도 남쪽엔 큰비가 내렸다. 새벽 출근길을 재촉하던 깎새는 원래 가던 지하차도가 통제되는 바람에 돌고 도는 수고를 새벽 댓바람부터 겪었고 점방 주변 도로 가 공용주차장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지대 높은 주차구역으로 차를 옮기다 비를 함씬 맞아 버렸다.
곳곳에서 물난리로 곤욕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그 덕분에 가을과 바로 직면했다. 하늘엔 적란운이 피어 가을하늘답게 높고 청명해졌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더없이 삽상하다. 가을 태풍이 더 맵다면서 앞으로 일기 불순을 각오해야 한다는 불길한 예보가 잇따르지만 내일 걱정은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 이 가을을 맘껏 즐기기로 한다.
귀뚜라미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가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여름과 가을이 대립하는 구도로 시를 읽으려 한다. 여름은 억압, 가을은 자유를 상징한다고 말이다. 시 독해가 어째 너무 억지스러운가. 더 비약시켜 볼 테니 두고 보시라.
귀뚜라미가 보내는 타전 소리, '귀뚜르르 뚜르르'가 꼭 '아브라카다브라'로 들린다. 소원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아브렉 아드 하브라'에서 유래한 주문. 그 원래 뜻은 '당신의 불꽃이 세상을 밝힐 것이다'라나.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와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라는 두 시구에 주목하고 싶다. 문장이 '~ 있을까'란 의문형으로 끝을 맺는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읽어 버리면 해석이 자칫 꼬일 수가 있다. 암만 애를 써도 소용이 없어 낙담하는 식으로 말이다. 대신 '~ 있을까'를 '~이고 싶다'나 '~ 이어야 한다'로 읽어 보면 어떨까. 귀뚜라미 울음 소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가 됨으로써 세상을 밝힐 게 분명하다. 즉, '불꽃'과 '울음'은 이음동의어가 되는 셈이다. 하여 <귀뚜르르 뚜르르=아브라카타브라>라는 공식은 성립한다. 이현령비현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