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칼럼에 꽂힌 채로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칼럼 저자 글솜씨가 빼어나서가 아니다. 칼럼 속에 등장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이 사는 방식에 감명해서다. 유명해졌으니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그니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니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행로난인 까닭은, 암만 발버둥을 친다 한들 도저히 잡힐 것 같지도 않을 욕망을 향한 멈출 줄 모르는 집착이랄지 쥐좆만도 못한 알량한 성취에 취한 나머지 그걸 드러내고 싶어 환장하는 무분별한 과시욕이 고질이 된 채 고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지 오래이기 때문이리라.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반기는 이유는 단지 그의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그의 삶이 반영되고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한강이 하는 말과 행동이 좋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인터뷰에서 했다는 한강의 말을 지면에서 읽고, 주변을 둘러본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자아가 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저마다 세상 만사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소셜미디어에 실어 발신한다. 악명을 쌓은 이들의 유치한 독설이나 농담이 버젓이 일간지의 인터넷판에 실린다. 저마다 독한 말을 내뱉고, 그럴듯한 말을 내던져 기사에 인용되려고 애쓴다. 유명해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한강은 다른 삶을 보여준다. 술도 안 마시고, 커피도 끊었고, 여행도 거의 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동네를 산책하고, 차를 마신다. 그의 삶이 더 좋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이 흥미롭고, 행복하고,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에도 견주지 않고, 존재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는 삶. 과잉의 시대에 갇힌 우리는 간소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저항이 될 수 있지 않을까.(김봉석 문화평론가, <조용하게, 천천히 가는 사람들>, 경향신문, 2024.10.25 에서 )
단순하고 간소하며 고요하게 살기를 진정 바라지만 과연 이 세상에 본보기로 삼을 대상이 아직 남아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다행히 그니가 있어 적잖은 위안을 얻는다. 덕분에 설령 힘들지언정 그니를 닮은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에 생동하는 기분이 정말 좋다.
칼럼을 읽으면서 불현듯 한창훈 소설 한 대목이 떠올랐다. 고향인 거문도로 돌아가 원고 쓰고 이웃과 뒤섞이고 낚시와 채집을 하며 지낸다는 소설가를 동경한 지 오래다. 그런 소설가에게서 '해탈'이란 단어가 뜻하는 바를 곱씹곤 한다.
아이는 싱긋 웃으면서 설명을 멈췄다. 의연하지 못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오로지 다이아몬드로만 이루어진 별이라지 않는가. 높은 열과 압력, 탄소가 있으면 되니 확률상 우주 어딘가에 있기는 할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다이아몬드가 아주 비싼데."
"왜, 그게 없으면 인간은 죽어?"
"아니."
"그럼 아파?"
"아니."
"근데 왜 비싸?"
말문은 또 막혔다. 도대체 왜 비쌀까.
경제학 용어 중에 '스미스 패러독스'라는 게 있다. 해양대학 일학년 교양수업에서 배운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비싸다. 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없어도 아무 문제 없다. 반대로 물이나 공기는 꼭 필요하다. 없으면 곧바로 죽는다. 그런데도 가격은 제로에 가깝다.
도대체 왜 꼭 필요한 것은 공짜이고 굳이 필요 없는 것은 값이 비쌀까. 이 모순을 고민하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끝내 이론으로 정의 내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어 있다. 그의 후학들이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했다. 희소성의 원칙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 설명이 무슨 소용 있을까. (한창훈, 『네가 이 별을 떠날 때』, 문학동네, 2018, 158~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