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무일이었던 그제 화요일, 집 에어컨을 교체했다. 틀면 뜨신 바람만 나와 게정이란 게정은 다 부리는 마누라 등쌀 때문에 가뜩이나 더운데 거의 쪄 죽을 판인 깎새가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조치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깎새가 한 일이라곤 교체하는 일꾼을 감독한 것밖에는 없었다.
작년부터 더위를 부쩍 타는 마누라. 운우지정이라는 게 남아 있을 무렵에는 삼복에도 춥다고 깎새 품을 기어이 파고들며 귀찮게 굴더니만 삭풍 부는 계절조차 남편을 차라리 37도 열덩어리로만 취급하는 여자로 변해 버린 마누라. 여자 변신은 무죄라지만 갱년기 치고는 감당하기가 벅찬 고난의 시기다. 가화만사성을 위해서는 '나 죽었소'하고 직수굿하는 게 상책이라서 암팡진 포달을 온몸으로 받아내고는 있지만 깎새도 사람인지라 점점 임계점에 가까워지는 걸 직감한다.
그러던 차에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깎새 부친이다. 부친 기질로 미루어 모친한테 갱년기랄 게 있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긴 하지만 같은 남자로서 그나마 이해해 주리라 여겨서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늘어놓았는데 돌아오는 답이 참으로 편파적이었다.
- 그 나이에 나가서 일하랴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랴 얼마나 애를 쓰냐. 갱년기라고 했으니 그에 맞게 위해 주면 그만이지 우는 소리를 왜 해? 내 앞에서 니 마누라 투정 부릴 처지냐?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형국이라서 말꼬리를 얼른 다른 데로 돌리려는데 부친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덜컥 에어컨 교체 계약을 해 버렸다. 낭보를 마누라한테 전했더니 아이들이 함께 자는 큰방에다 벽걸이 에어컨까지 달면 금상첨화였겠다며 아쉬워했고 그걸 또 전해 듣고 옵션을 추가하는 계약으로 변경해 준 깎새 부친. 사위 사랑은 장모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아름다운 옛말을 실행으로 옮기는 흐뭇한 광경에 깎새는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속으로 연발할 뿐이었다. 부친 아니었으면 언제 끝날지 모를 역대급 무더위 내내 마누라한테 뜯겼을 테니 말이다. 양친 살아 생전에 섬기기를 다하리라 새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랬다.
소중한 휴일을 장장 5시간에 걸친 에어컨 설치 작업 감독하느라 진이 다 빠져 버린 깎새는 이른 잠자리에 들었는데 세 여자가 나누는 대화(대화라기보다는 마누라 일장 훈시에 가까웠지만)에 얼핏 잠을 깼다.
- 에어컨 새로 달아 주신 할아버지께 내일 일제히 감사 톡을 날린다. 알겠나?
요즘처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일 때가 없었다. 하루하루 전전긍긍할 때 가정의 항구적인 화목과 평화를 위해 '플렉스!'할 재력은 필수불가결하다. 부친을 보면서 매번 절감하지만 부친 발끝도 못 따라가는 무능이 송구하기만 한 깎새. 그러거나 말거나 끝물이긴 해도 올 여름 한시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