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덜하지만 요금 문제로 얼굴 붉힌 적이 꽤 된다. 그중에서도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앳된 사내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와 벌인 실랑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젊은 엄마가 아이 머리를 투블럭으로 깎아달라고 주문했다. 일반 커트는 5천 원이지만 투블럭이나 모히칸처럼 스타일커트는 8천 원을 받는다고 했더니 밖에 걸어둔 요금표에는 5천 원이라고 써붙였길래 부담없이 들어왔는데 커트면 다같은 커트지 투블럭은 왜 8천 원을 받느냐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게 빈정이 상한 낌새였다. 그러면서 그냥 짧게 깎아 달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바꿨다.
분무기를 들어 아이 머리에 물칠을 막 하려는데 이번에는 "카드 결제는 되지요?" 묻는다. 알아서 먼저 물어주니 어찌 그리 눈물 나도록 고마운지. 그렇게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간 아마도 정산이 녹록지 않았을 게다. "요즘 세상에 카드 안 되는 가게가 어디 있어요?" 대들면 응수할 말이 궁해지는데다 지갑에 카드밖에 없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라고 우기면 깎새도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할 게 뻔한데 혹시 모를 개싸움을 예견이나 한 듯 물어봐 주니 얼마나 고맙던지.
"카드 단말기를 비치하지 않았습니다. 현금이 없으시면 번거로우시더라도 계좌이체 부탁드립니다"라고 조심스럽게 응수하니까 젊은 엄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쿨하게 "다음에 올게요. 아들, 가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흔한 장면은 아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깎새 역시 무덤덤하게 커트보를 개켰다.
깎새도 지갑에 현금 안 들고 다닌 지 오래여서 카드 사용의 유용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개업하자마자 카드 단말기를 비치할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업체도 물색해 뒀었다. 부친 점방은 카드 불가 영업 방침을 오랫동안 고수했고 앞으로도 고수할 텐데 그걸 개업 앞둔 깎새한테 세뇌시켰다. 5천 원 푼돈을 카드로 결제하면 차 포 떼고 나면 뭐가 남겠냐면서. 일리가 없지 않지만 오롯이 장사치 위주 사고방식임을 또한 부인하지 못한다. 고객 지상주의를 표방한다면 요즘 추세에 카드 단말기 비치는 필수다. 그렇지만 결국 깎새는 카드를 받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최근에 '소상공인 부담경감 크레딧 지원'이라고 해서 50만 원 한도 내에서 소상공인 전기료, 수도료, 4대보험 따위를 지원하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자기가 소상공인이 아니라고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깎새가 소식 듣자마자 득달같이 지원한 건 당연한 수순. 하지만 깎새는 탈락했다. 탈락 사유가 의외였다. '24년 또는 '25년 연 매출액 0원 초과 3억원 이하이면서 영업중인 소상공인이어야 한다는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즉 연 매출액 0원이어서 지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깎새는 부가세 신고를 꼬박꼬박 했다. 부가세 매출액은 0원이고 당연히 신고액도 0원이다. 부가세 신고할 매출이 없어서다. 지원대상을 심사하는 측에서는 부가세 신고 내역을 보고 판단한다고 했다. 그러니 깎새는 매출이 없어 영업을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소상공인이 된다. 서류 상으로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다.
푼돈을 벌지언정 현금 장사라 속은 편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카드 단말기 설치 여부를 두고 망설일 무렵 좀 더 숙고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후회가 든다. 나라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마련이고 그 시스템 안에서 놀아야 나라가 주는 혜택을 받아먹을 수 있는데 그걸 간과한 게 잘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