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못 속인다

by 김대일

마스크로 안면을 가렸는데도 깎새 안색을 금세 눈치 채는 손님을 만나면 신통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퉁명스러운 말투부터 여과없이 불쑥 튀어나오니 저 작자 심기가 불편하구나 지레짐작하거니와 마스크로 가렸건만 까닭없이 노기 서린 눈매까지 목격하면 애먼 손님은 억울하다 못해 분노할 수밖에 없다.

- 나한테 감정 있어요?

앞선 사정이 빌미가 돼 심기가 불편한 건 맞지만 방금 온 손님한테 느끼는 악감정일 리 없다. 마스크 위로 빼꼼 나온 눈동자가 그런 오해를 자초했다면 분명 깎새가 잘못 처신한 게다.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둔감한 사람일지라도 눈망울에 서려 있는 어떤 기미로 상대 기분을 단박에 알아채는 걸 보면 다른 건 다 속여도 눈은 못 속인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감정 기복이 워낙 심하고 그게 또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깎새라서 커트 작업을 할 적마다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눈만 안 가리지만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이다. 하여 요새는 이발의자에 앉은 손님 얼굴을 아예 쳐다보질 않고 묵묵히 작업에만 열중하는 꼼수를 부린다. 앞거울에 비친 손님과 눈이라도 마주칠라 치면 내밀한 속내가 여실히 탄로날지 모른다는 경각심으로.

눈동자로 사람을 알아채는 인물에 관한 히가시노 게이고 단편은 흥미롭다. 미아타리(불시 발견)라고 하는 수사 기법이 소설의 주요 소재다. 일본 도쿄 경시청 미아타리 수사원들은 수배자 수백 명의 인상착의를 암기한다. 주목하는 부분은 수배자들의 눈매란다. 세월이 흐르거나 성형수술을 해도 얼굴의 골격이나 눈, 코 라인 특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나. 번화가나 전철역 앞에 무작정 서서 기억력과 두 눈만으로 지명수배자를 찾아낸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라지만 성과가 꽤 있나 보더라.

우치무라는 동창인 야나기다의 초대에 응해 나간 미팅 자리에서 모델치고 키는 작지만 눈가의 화장이 인상적인 모모카를 알게 된다. 검은 눈동자에 갈색이 서리고 눈동자가 한층 크게 보이는 컬러 콘택트 렌즈를 낀 모모카. 각자의 관심사가 에니메이션 시청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제를 이어가지만 이상하게도 모모카는 통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꺼린다. 집에 데려다 준대도 사양하고 고향 얘기를 물어보면 화제를 바꾸며 적극적으로 자기를 방어했다. 단단히 마음을 먹은 우치무라가 하루는 무조건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면서 모모카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모모카는 자기를 에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착각한 것 같다면서 그 환상을 깨게 해준답시고 콘택트 렌즈를 뺀다. '그래도 날 사랑해?' 묻듯. 렌즈를 벗은 모모카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우치무라는,

- 너는… 내가 오랫동안 찾던 사람이야.

곧바로 그녀를 체포한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17)

'그대 눈동자에 건배'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 중 하나라고 한다. 옛날 영화 대사를 절묘하게 활용한 사례는 한국 드라마에도 있다. <멜로가 체질>에 나오는 세 여주인공 중 은정(전여빈 분)은 옛 애인의 허깨비하고 먹고 놀고 얘기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처자다. 상수(손석구 분)는 잘 나가는 CF감독이면서 은정처럼 전 재산을 기부해 기부계의 양대 산맥, 기부계의 두 또라이 중 한 사람이면서 은정과는 톰과 제리마냥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그 둘이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에서 '그대 눈동자에 건배'가 등장한다. 상수는 여태 말하지 않았던 서로의 얘기나 하자고 제안한다. 그 대사가 나간 뒤 드라마 수록곡인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거야'만 들리고 디졸브. 음성은 들리지 않지만 얘기를 하는 은정이나 그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상수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은정이 옛 애인의 허깨비와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놓고 상수는 이해하려 드는 것 같았다. 배경음악이 그치고 장면이 전환되자 상수는 은정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른다. 그리고 잔을 들면서 말한다.

- here's looking at you, kid.

의아해하는 은정을 보면서 덧붙인다.

- 카사블랑카에 나온 대사야. 우리나라에서 참 멋지게 번역됐지.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난…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잔을 드는 상수. 맞춰 줘야 하니까 은정도 잔을 든다. 상수는 그 잔을 지나쳐 은정의 눈에 잔을 가져다 댄다.

수배자의 인상착의(특히 눈매)를 기억해뒀다가 체포하는 우치무라나 무엇을 보건 이해하겠노라며 은정의 눈동자에 건배를 하는 상수나 두 눈을 통해 상대를 알아챘다. 다른 데는 몰라도 눈은 속이지 않는다는 걸 구현한 아주 훌륭한 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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