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일요일 늦은 밤, 독서실 갔다가 돌아온 고3 막내딸이 덥다고 에어컨을 켜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혹시 전력 수요가 넘쳐 블랙아웃이 일어났나 싶어 단지를 내다보니 다들 멀쩡했다. 그럼 집안 내부 문제라는 거라서 내려간 차단기 버튼부터 올렸다. 하지만 바로 내려가 버렸다. 올리면 내려가고 올리면 내려가길 여러 차례. 다른 수가 없어서 급히 경비실(전원이 나가는 바람에 인터폰도 먹통이라)로 향했다.
당직 서는 기계실 직원을 불러 원인을 규명하게 했다. 직원은 차단기 뭉치, 전기계량기를 만졌다가 집안 전기제품도 살피는 시늉을 했지만 똑떨어지는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저 중앙 통제 차단기 외 개별 차단기 중 누전으로 인해 내려가는 버튼만 찾아낸 뒤 날 밝으면 전문가 불러 조치받으라고 일러 주고 자리를 떴다.
하필 내려간 개별 차단기가 에어컨과 냉장고 따위 전기제품과 연관된 까닭에 냉장고 속엣것이 슬슬 걱정됐다. 이대로 놔둔 채 밤을 지새면 다 상하게 될 게 뻔해서 조바심까지 일었다. 하여 깎새가 머리를 굴렸다. 에어컨 아니면 냉장고가 문제라서 차단기가 내려갔다면 전원 코드를 빼면 차단기는 올라가고 전기가 통할 테니 냉장고 두 대 중 한 대만이라도 건사하다면 그쪽으로 옮겨 보관하는 게 낫겠다는 복안이었다.
일단 에어컨 전원 코드부터 빼고 차단기를 올려봤다. 바로 내려가 버렸다. 그럼 냉장고가 문제인데, 두 대 중 상대적으로 최근에 구입한 김치냉장고 말고 결혼 혼수품으로 구입해 25년 넘게 한결같이 깎새네를 지킨 오래된 냉장고 전원 코드부터 빼봤다. 아, 차단기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마누라는 오래된 냉장고 속 냉장, 냉동할 것들만 골라 전원 켜진 김치냉장고에 넣기 시작했고 야밤에 음식물쓰레기통을 수차례 왔다갔다했다. 그러고는 결기 가득찬 목소리로 일전에도 이 냉장고 때문에 전기가 나간 적이 있다면서(깎새는 그런 기억이 없지만) 이참에 새로 구입하겠노라 선언했다.
넘버 원이 그러겠다는데 거기에다 대고 비토를 하거나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애물단지를 두둔할 만큼 깎새라는 인간이 담대하지 못해서 일체 군소리는 닫았다. 다만,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오래된, 더 정확히는 오래되어 정이 들 대로 든 대상과 불가피하게 생이별하는 새드 엔딩은 익숙지가 않아 받아들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 냉장고는 깎새 부부가 연을 맺는 그 순간부터 함께 연을 맺어 지금에 이르렀다. 뒤웅박 신세로 전락한 깎새 탓에 빨간딱지가 붙여지는 수모까지 겪기도 했던 그 냉장고는 깎새 부부와 두 딸들에게 풍족하진 않아도 배 안 곯게 먹을거리를 내놓는 데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섭식의 창고로 25년 넘게 공헌했던 오래된 냉장고가 그 가족의 일상을 위협하는 주범이 되어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한 역설은 괴롭다. 마누라는 확고부동했고 조만간 전자제품 매장에 들러 새로운 냉장고를 구입할 것이다.
출근을 위해 채비를 갖추던 깎새는 불도 안 켠 부엌 한 켠에 전원 코드가 빠져 작동이 멈춘 오래된 냉장고쪽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새벽 어둠 속 실루엣이 하도 처연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