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과 감정 소모전을 벌이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운 뒤로 깎새는 손님쪽에서 거슬리는 언행이 나올라치면 그 즉시 말문을 닫아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손님 불만을 상쇄하기 위해 정반대로 행하는 청개구리 전략을 취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 둘을 적절하게 섞는 태도를 보이려고 애를 쓴다. 이런 식의 대응에 대한 고객 반응은 대체로 무난한 편이나, "당신, 나하고 함 뜨겠다는 거야!"라는 전혀 뜻밖의 대립으로 첨예화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손님 입장에서 보면 감히 하느님하고 동기동창인 손님한테 개기는 것처럼 비춰지는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손님들로 장사진이던 일요일 오후, 대기하고 있던 낯선 손님이 이발의자에 앉더니 알쏭달쏭하게 주문을 냈다.
- 조금 짧게 깎아 줘요.
개업한 이래 가장 헷갈리는 주문이 '조금 짧게'이다. 조금만 깎으라는 건지 짧게 깎으라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그러니 깎새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약간만 깎을까요, 치켜 올릴까요?
대체로는 못 알아먹는 깎새가 안쓰러워 알아들을 표현으로 순순히 바꾸는데 이 손님 예사롭지 않았다. 대뜸,
- 사장 말투가 어째 이리 건조해!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깎새 노릇 삼 년이라 공중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산전수전은 이미 섭렵한 뒤다. 하여 이런 류의 손님한테 말꼬리 잡히면 골치 아파진다. 그걸 직감한 순간 깎새가 일단 말문을 걸어 잠근다. 밀려드는 손님들로 몸이 고된 탓에 말투에 짜증이 묻어 나온 건 오롯이 깎새 불찰이긴 하다. 하지만 그 불찰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칫 더 큰 사달이 몰려온다는 경험적 추론이 'shut up!'을 일단 자동 작동시킨 게다.
이후로는 물 흐르듯 순조롭다. 아니 순조로워야 하는데 이 손님, 똑같은 소리 계속하지만 예사롭지 않았다. 커트를 하고 염색약을 바르는 내내 앞거울을 통해 손님 동태를 살피니 손님이 점방 문을 열고 나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즉 끝날 때까지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세기의 명언을 떠올리게끔 긴장을 고조시키는 특이한 마성의 소유자임을 포착하고 말았음이니.
하여 깎새는 전략을 수정했다. 침묵 대신 호의에 승부를 걸기로. 서두에서 밝힌 바 손님 불만을 상쇄하는 청개구리 전략, 즉 건조한 깎새 첫인상을 유들유들하고 살가운 깎새로 탈바꿈시키는 노력을 경주하기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염색약 바른 머리를 세척하려고 샴푸질할 때 평소와는 딴판으로 가장 친절하고 세심한 손놀림을 구사했고 손님이 머리를 말리는 수건까지 미리 척척 대령하는 센스까지. 거기다가,
- 뒤쪽에 보시면 헤어드라이기, 빗, 기타 용품이 진열되어 있으니 얼마든지 쓰시면 되겠습니다.
여차하면 드라이에 스타일링까지 손수 해줄 태세인 비굴 모드로 일관한 깎새. 하지만 손님은 듣는 둥 마는 둥 수건으로 머리만 대충 말린 뒤,
- 얼만교?
- 커트에 염색까지 만이천 원입니다.
만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두 장을 휙 던지고 가차없이 자리를 떠나 버렸다. 국면 전환 해보겠다고 그토록 쌔가 만발이 빠졌음에도 허무한 엔딩이라니! 깎새는 새삼 세상을 배운다. 뜻대로 될 것 같으면 벌써 떼부자되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