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출근할 적마다 손님 머리만 매만지다가 오늘 하루 다 날려 먹을 걱정을 하면 이게 사람 사는 짓인가 싶다가도 그거라도 하니까 집에서 안 쫓겨나는 택이라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누라한테만은 그런 표 안 내려고 무진 애를 쓴다. 중년 남자의 생존 본능이다.
그렇지만 혼자서 암만 북 치고 장구 쳐도 일상이 무료해지면 사람이 무력해지기 일쑤다. 그걸 또 못 참는지라 점방 안에서 뭔가 재미를 찾으려고 또 애써 기를 쓴다. 문제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으니 무료함을 탈출할 방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누구는 캘리그라피에 맛을 들였네 데생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우쭐대는가 하면 옆 점방 국수집 이모까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카리나 연주로 시간을 때우는 판인데 볼 줄 알고 들을 줄만 알지 다룰 줄 아는 게 하나 없는 깎새는 무료해지기 시작하면 그 무료함에 철저하게 짓이겨지고 만다.
디자인을 공부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돼먹지 않은 상상을 해본다. 시각을 통해 미감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혹시 일상을 좀 더 다채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 다채로움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굴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역동적으로 일상에 심취하는 선순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일상에 푹 빠져 살 테니 무료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게 틀림없다.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던 윌리엄 모리스처럼 말이다.
윌리엄 모리스는 1879년 2월 19일 버밍엄 예술협회와 디자인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바로 저 『로빈슨 크루소의 다음 여행』의 구절을 인용하며 주장한다.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급조된 마을 벽화나 빌딩 앞에 의무적으로 설치된 어리둥절한 대형 조형물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팔기 위해 허겁지겁하는 노동이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공들인 노력, 그리하여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 말이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노동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윌리엄 모리스는 인간을 비천한 노동으로 내모는 무지막지한 산업화와 상업화에 저항하며,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세웠다. 그렇지만 혁명의 구호가 울려 퍼질 광장에 세워질 거대한 이념적 조각 작품을 만들거나, 대형 운동장에서 행해질 집단 체조 디자인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상을 채우는 벽지, 직물, 가구 등의 디자인과 생산에 주력했다. 일상의 물품에 깃든 아름다움이야말로,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하는 공들인 노동이야말로, 삶을 결국 구원하리라고 굳게 믿으면서.(김영민,『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159~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