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다닐 때 든 동아리는 불교반이었다. 방학이 되면 불교반은 가까운 사찰로 수련회를 떠나곤 했다. 대입 학력고사를 치른 뒤인 고3 겨울방학 때도 수련회를 따라갔는데 거기서 무턱대고 묵언수행默言修行이라는 걸 자청했었다. 묵언수행의 목적은 말을 일체 하지 않고 참선에 열중함으로써 말을 해 짓는 온갖 죄업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려는 데 있다. 그때 무슨 바람이 불어 그 어려운 걸 자청했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숫제 정신이 가출을 해 버린 택이었다. 일단 저지르고 봤지만 얼마나 지속될지 스스로도 기연가미연가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마침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걸 확인하자마자 기쁨에 겨워 입이 저절로 터지는 바람에 수행을 깨고 말았다. 치기어린 시도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때 그 묵언수행이 두고두고 어떤 계시로 남아 깎새에게 영향을 끼친 바가 적지 않다. 터진 입이 항상 문제라는 걸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
깎새가 애송하는 선승 료칸의 하이쿠俳句다. 남은 벚꽃조차 머잖아 질 숙명을 타고났음은 개선장군 행렬 뒤에서 노예가 외쳤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연상시킨다. '너무 우쭐대지 마라.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를 17음에 담아낸 하이쿠 특유의 순간의 미학. 이는 무소유와 고행에 철저했던 선승이 깨달은 진리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부질없고 헛된 게 말이니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5·7·5 17음으로 이루어진 단시, 즉 하이쿠로도 충분하다는.
료칸은 또 '말에 관한 계율'을 설파했다.
수행자여! 세 치 혀를 항상 주의하라.!
1. 말이 너무 많은 것
2. 이야기가 너무 긴 것
3.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
4. 제 집안이나 출신을 자랑하는 것
5. 남의 말 도중에 끼어드는 것
6. 쉽게 약속을 하는 것
7. 친구에게 선물을 주기도 전에 먼저 말로 설레발치는 것
8. 가난한 이에 선물하고, 그걸 남들에게 자랑삼아 떠드는 것
9.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것
10. 슬픈 사람 곁에서 웃고 노래하는 것
11. 친구가 숨기고픈 일을 폭로하는 것
12.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막 대하는 것
13. 마음에도 없는 말을 쉽게 내뱉는 것
료칸이 제시한 계율을 모두 지킬 금욕주의자가 되기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깎새이지만 고등학생 시절 경험했던 묵언수행을 떠올리며 그 '세 치 혀'가 요망하게 굴지 않게 경계하고 또 경계하려 애쓴다.
작년 12·3 내란 이래 불안했던 심사를 달래려고 찾아 들었던, 이른바 신경안정제가 여럿 있었다. 아사리판 같은 정국에서도 그들이 쏟아내는 정치 비평을 통해 불안을 누그러뜨리고 위안을 얻으려 했던 건 그들 외엔 달리 대안이 없었다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말의 부질없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아이러니다. 그들 덕에 엄혹했던 시기를 견뎌왔다는 점에서는 깊은 경의를 표하지만 그들이 수없이 쏟아냈던 말의 부스러기 중에 행여 비수가 되어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내심 걱정했었다.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여당 후보 배우자를 비하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당대 최고의 정치비평가는 정치비평을 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리고 엊그제 대한민국 국회 의석 중 12석을 가진 정당 대변인이 당내 성비위 사건을 문제 삼아 탈당했다. 그 대변인은 탈당 기자회견에서 2차 가해 논란을 일으킨 현 여당 교육연수원장에게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 둘이 함께 나온 유튜브 방송을 즐겨 보던 깎새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처절한 말의 복수가 시작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