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미국을 통찰하자

by 김대일

'미국'하면 떠오르는 칼럼이 있다. 쓰여진 지 오래된 데다가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미국식 생활방식'을 통찰했다는 점에서 양아치보다 못한 작금의 미국 행태를 비판하는 데 과연 합당한가 의문이 들 법하다. 그럼에도 합리성으로 포장한 폭력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미국식 사고방식에서 빚어지는 정신적 빈곤을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미국이란 나라의 천박함을 노정했다는 점에서는 그 시의성만은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주요 대목만 아래와 같이 뽑았다.

고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미국 대학원 유학 시절 겪었던 에피소드다.


어느 날 야간수업을 듣고 제일 늦게 방을 나서던 나는 전등을 끄고 나오기 위해서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스위치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강의시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궁금해서 옆방에 가보았다. 거기도 스위치 같은 것은 없었다. 웬일일까? 나중에 들으니, 건물 전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전기는 중앙변전소에서 통제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밤낮없이 강의실이건 연구실이건 전기를 켜놓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황당하고도 충격적인 뉴스였다.(김종철, 『발언 Ⅱ』, 녹색평론사, 78~79쪽)



그가 목도한 것은 '미국식 생활방식'의 구체적인 진상이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전기란 공기 같은 것, 즉 건물 속에 들어가면 그냥 늘 있는 것이어서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전기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의 삶과 자연이 망가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생활구조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듣던 '협상 불가능한 미국식 생활방식'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구나!(같은 책. 79쪽)


"세계인구의 6.3퍼센트를 점하는 미국은 미국식 생활을 위해서 세계의 부 50퍼센트를 필요로 한다.… 미국이 윤리적인 외교를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을 침략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공언한 국제문제 전문가 조지 케넌의 발언이 나온 게 1948년이고 그 이후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라고도 했다. 미국에 공부하러 건너간 저자는 무척 심란했던 모양이다.


'미국식 생활방식'의 구체적인 진상을 목도하고, 나는 복잡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오늘날 대학이나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 터무니없는 미국식 생활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전세계로 확산하려는 목적에 봉사하는 문화적 제도에 불과한 것이며, 대학 내 소수의 비판적인 학자·지식인들도 근본적으로는 '충성스러운 야당'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내가 미국에 무슨 공부를 왜 하러 왔는지 심히 모호해졌다.(같은 책, 79~80쪽)


유한한 지구환경에서 무한한 성장이라는 건 불가능하지만 미국식 생활방식은 통제하지 못하는 이기심으로 탐욕만을 좇는 절멸의 전형일 뿐이다. 문제는 공익이 아니라 사익 추구가 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매우 난폭한 논리인 신자유주의에 오랫동안 젖어버린 우리 역시 미국인 못지않게 미국화 되었다는 점이다. 각자도생만큼 서글프면서 암담하고 비극적인 말도 없지만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내뱉는 말이 되어 버렸다.

'미국식 생활방식' 앞에서 절망을 느끼던 필자를 위로해 준 건 루돌프 바로라는 철학자였다. 바로는 원래 동독의 공산주의자였지만, 반체제 혐의로 구금됐다가 서독으로 추방된 이후 녹색당 창설기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고 이 무렵 '절멸주의'라는 용어로써 현대문명이 이미 집단자살체제가 되었음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통렬했다. "우리는 안전을 추구하되 무기를 버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학물질을 쓰지 않는 보건위생을 추구해야 하고, 산업적 시스템 바깥에서 생계를 강구해야 하며, 땅과 숲의 보존을 위해서 짐승고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생명의 적이며 사탄이다." 요컨대 우리 개개인이 특별히 악한 동기가 없더라도, 오늘날의 거대산업체제에 별생각 없이 순응하는 생활 자체가 가공할 악행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81쪽)



고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사상을 선명한 단어로 풀어내기에는 깎새로서는 무리다. 하지만 지금까지 폭주했던 삶에 제동을 걸고 문제점을 찾아 자아를 개조하고 사회를 고치며 세상을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절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은 본능적으로 들기는 한다. 유명한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마냥 '이러다가는 다 죽을 수 있다'는. 칼럼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생각해보면, 원래 인간생활에서 물자와 에너지를 흥청망청 소비하는 생활은 정상이 아니라 일탈이라고 해야 옳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구한 인류사에서 '경제성장' 시대는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문명비평가 루이스 맴퍼드는 고대 그리스가 자유와 자치에 입각하여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던 기반에는 간소한 생활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와 가난은 쌍둥이"였다.

생명에는 빛과 밝음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둠과 그늘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늘과 어둠이 없으면 수면도 휴식도 취할 수 없다. 전기를 꺼야 밤하늘의 별들도, 북극성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미국식 생활방식'의 지배 밑에서 별을 잃고, 침로針路를 잃은 채 방황하는 이 정신적 빈곤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같은 책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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