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개미

by 김대일

인도 신화에서 빛 시작 창조의 신 비슈누와 어둠 끝 파괴의 신 시바가 합쳐진 형태를 의미하는 '하리하라'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이은희 과학저술가. 그녀가 쓴 칼럼 중에는 먹이를 찾아 나선 개미 떼들의 일사불란한 귀갓길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앞선 개미들이 분비하는 페로몬 신호를 믿고 잘 훈련된 군대 행진처럼 한눈팔지 않고 부지런히 따라가는 귀갓길 말이다. 하지만 눈 밝은 과학자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한 개미들이 '다수'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고 한다. 일부 개미는 실수로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냄새 정보가 아니라 시각 정보에 의존해 새로운 경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도 한다나. 그리고 개미 집단의 규모나 크기에 상관없이 이런 '길치' 혹은 '개척자' 개미들의 비율은 5~15%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된다고도 했다.



다수의 개미들이 따르는 길은 집으로 가는 것이 보장된 ‘확실한 길’이다. 하지만 이탈자 개미들의 앞에 놓인 길은 귀가가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길’이며,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위험한 길’이다. 확실한 길을 두고 미지의 경로로 나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일정 비율의 개미들은 늘 이런 위험하고 불확실한 길로 들어서곤 한다.

이렇게 일탈한 개미들의 상당수는 예상대로 무사히 귀가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 중 아주 일부는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해 집단의 부를 늘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더 빠르고 좋은 길을 찾아내 전체 루트를 개선하기도 한다.

개미 집단이 소수의 일탈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보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행동이 장기적 혹은 거시적으로는 집단의 생존력을 높이는 전략적 탐색이기 때문이다. (<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어떤 길을 갈 것인가>, 경향신문, 2025.08.28 에서)



개미 말고도 불확실하고 위험한 길을 택했다는 한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를 내놨었다.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니 과연 개미처럼 장기적 혹은 거시적인 전략적 탐색을 위한 일탈 행위였을까.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아,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게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난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 (손혜숙 옮김, 『가지 않은 길』, 창비, 2014)



시가 발표된 이래 우리는 참 오랫동안 오독했을지 모른다.



이 시를 읽는 관행적인 독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갈래 길 앞에 선 화자가 있다. 두 길을 다 걸을 수 없어 고민에 빠진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을 은유한다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간 안전한 길을 택할 것인가, 전인미답의 길을 과감히 택할 것인가. 화자는 후자를, 즉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더 끌렸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임을 예감한다. 이어지는 마지막 세 줄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시구절 중 하나일 것이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중간 부분이 좀 알쏭달쏭하기는 해도 저 마지막 세 줄에 이르면 이 시는 다시 명쾌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감동의 포인트는 두 가지다. 오직 하나의 길만 택할 수 있을 뿐인 인생의 유한성에 대한 회한, 그리고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자의 고독과 아름다움. 그래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인용되기 적합하다. 인기 없는 전공을 택해 일가를 이루고 이제는 정년퇴임을 앞둔 노교수가 퇴임사를 할 때. 혹은 이제 막 어떤 정치적 결단을 한 정치인이 자신의 선택은 눈앞의 사사로운 실리를 좇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훗날의 역사적 평가를 각오하는 비장한 연설을 할 때 등등.(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격주시화 (隔週詩話)-‘가지 않은 길’ 속의 여러 갈래 길>, 한겨레, 2016.07.01. 에서)



시 중간 부분은 읽을 적마다 갸우뚱하게 만든다. 화자가 앞에서 밝힌 자신의 말을 뒤집는 택인데 그런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시에는 우리가 위에서 정리한 이 시의 메시지와 명백히 충돌하는 구절이 얼룩처럼 포함돼 있다. 두 갈래 길 중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을 택하겠다고 말한 뒤에 화자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는 듯한 이런 구절을 적는다.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이 네 줄은 기묘하다. “정말 거의 같게”(really about the same)나 “한결같이”(equally)와 같은 표현들은 앞서 화자가 기껏 부각해둔 두 길의 차이를 지우면서 두 길에는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시의 후반부에 마련돼 있는, ‘험로를 택하는 자의 고독’이라는 감동적 요소를 스스로 약화시킨다. 그런 감동 때문에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네 줄을 불필요하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삭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위 칼럼)



선택의 기로에 선 두 길에는 사실상 별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그때의 선택을 미화하려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빠질지 모른다는 혐의.



두 갈래 길 앞에 섰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화자는 일단 통행이 드물다고 느껴지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상황을 과장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두 길에는 사실상 별 차이가 없음을 밝힌다. 바로 이 순간에 화자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간파했으리라.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를 원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이유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를 바란다는 것,'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예감한다. 자신이 훗날 이날의 선택을 다소 미화된 방식으로 회상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시를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이 시의 진짜 얼굴이라 단언은 못해도, 최소한, 간과되어온 다른 얼굴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리라. 당시의 여느 전원시들처럼 다정하게 삶의 지혜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은밀한 복화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랭크 렌트리키아는 이 시를 "양의 옷을 입은 늑대"(『모더니스트 콰르뎃』)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10년 뒤 데이비드 오어는 이렇게 단언한다. "이 시는 캔-두 개인주의can-do individualism(나의 선택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인주의 - 인용자 주)'에 대한 경의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축하려 할 때 범하게 되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대한 논평이다." (위 칼럼)



여러 갈래의 갈림길 앞에서 과연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평론가는 칼럼 말미에 다음과 같이 밝힌다.



외로운 선택을 한 사람의 자기 긍정을 표현한 시? 자의적 선택에 사후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꼬집은 시? 후회가 많은 이에게 들려주는 부드러운 충고의 시? 나의 대답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한 번 놓친 길은 다시 걸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 시는 말하지만, 작품은 길과 달라서, 우리는 시의 맨 처음으로 계속 되돌아가 작품이 품고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남김없이 다 걸어도 된다.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위 칼럼)



살아가는 데 있어 지침이 될 만한 교훈이랍시고 시에서 기대했다면 단단히 오산한 셈이다. 예술의 가치를 처세술 따위로 치환하려는 작태는 칼럼을 쓴 이가 문학평론가라는 사실을 망각해서 벌어진 촌극이겠다. 그러니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평론가의 위트야말로 탁견이다.

그럼에도 두 갈래 갈림길에서 결정한 선택이 설령 '실패'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선택을 꿈꾸는 전체 집단의 5~15%뿐인 '길치' 개미는 매력적이지 않은가. 실패해 좌절하면서도 줄기차게 더 빠르고 좋은 길을 찾아내 인생이라는 전체 루트를 개선해 나가려는 끈질긴 모색이야말로 자기기만을 극복하는 진정한 캔-두 개인주의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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