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 반응

by 김대일

당신한테 파블로프 개처럼 반응하는 노래는 무엇인가. 깎새한테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그것이다. 1961년에 발표됐다는 오래된 가요가 귓전을 간지럽히면 거의 동시에 소환되는 추억 한 장면.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반응인 셈이다.

더위가 한창이던 1995년 8월. 유행하는 최신 가요나 팝송이 썩 구미가 안 당겨 아는 게 별로 없던 다이아몬드 하나짜리 소위 신참 소대장은 소대원들과 어울릴 만한 접점이 궁해 손해 보는 측면이 많았다. 당시는 김건모, 룰라 노래들이 가요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고 훈련이며 진지공사로 고되고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병사들이 부르는 노동요가 다 그 일색이라 한두 곡쯤 외워두면 언제고 요긴하게 써먹을 법도 했지만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신참 소대장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만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상급부대가 주최한 훈련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진급에 청신호가 켜진 대대장이 돼지를 잡아 대대 전체 회식을 열었다. 막걸리를 드럼통으로 받아 연병장에서 중대별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누가 소대장더러 한 곡조 뽑으랬다. 가만 보니 동료 소대장들은 이미 최신 유행가로 흥을 돋운 상태라 혼자 빼기도 뭐했다. 이왕 거하게 마신 김에 체신이고 뭐고 숟가락 꽂은 맥주병을 드는 것까진 좋았는데 마땅하게 부를 노래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김건모 모르고 룰라는 더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늘어지는 이소라를 부를 텐가 김광진을 열창할거나. 뭘 부르든 분위기만 안 조지면 되는 거니 에라 모르겠다, 냅다 던진 게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였다.

어럽쇼,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스윙 리듬을 탄 노래가 취기에 물든 부대원들한테 통했는지 따라부르다 못해 춤까지 추면서 난리도 아니었던 게다. 대학 시절로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운 기분파였던 신참 소대장 가만히 노래만 불렀을 리 만무했다. 대학교 MT 온 것도 아닌데 부대원들과 엉켜 흔들고 날뛰더니 급기야 계급장이 무색해지는 대동단결의 장이 펼쳐졌나니! 회식이 끝나고 저녁 점호까지 다 마치고 나자 중위인 고참 소대장이 막사 뒤 어두컴컴하면서 음침하기 그지없는 데로 불러내 한바탕 얼차려를 돌렸다. 체신머리없다고.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제맛이긴 하지만 한국말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낸 프랑스 샹송 가수(이베뜨 지로Yvette Giraud)가 부른 게 더 착 달라붙는다. 본토 입맛에 맞추려는 이방인의 애살이 같은 군인이면서 섞이지 못하던 신참 소대장의 지랄과 겹쳐서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9kubXYqsZqY

작가의 이전글숙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