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단상

by 김대일

집으로 향하는 느긋한 토요일 저녁 전철 안, 라디오 듣는 이어폰에서 달달한 멜로디가 귀를 간지럽힌다. 이태리 칸초네 같던데 제목도 모르고 가수도 모르겠다. 하지만 멜로디만은 확실하게 익다. 노래의 클라이맥스에서는 나도 모르게 영어 버전 가사를 흥얼거린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이리 딱 들어맞을 줄이야. 언제 적 노랜데 갑툭튀라니! 이런 내가 좀 무섭다.

<Io Che Non Vivo Senza Te 그대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는 1965년 산레모 가요제에서 7위로 입선한 곡이다. 가수이자 작곡가인 피노 도나지오가 작곡하고 노래했단다. 정감이 넘치는 멜로디로 인기가 치솟자 이듬해 영국 출신 여성가수인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영어 버전으로 새롭게 발표했고 세계적으로 히트했다.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 노래 얘기다. 한창 팝송에 빠져 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 버전으로 처음 접했고 테이프 늘어질 때까지 들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왜 유독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사랑한다고 말은 안 해도)'라는 가사( 클라이맥스)가 그 시절 사춘기 중학생 마음을 사정없이 후벼 팠을까. 그렇게 쉼없이 따라 부르다 보면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왠지 가슴 설레이는 연인을 만날 것만 같은 로맨스를 꿈꿨을까. 그런 낭만적인 시절이 내게 있었다고? 노래가 주는 즐거움이다.

그 당시 숫기라곤 없던 나임에도 노래만 나왔다 하면 흥얼거리던 이른바 '십팔번'이 몇 곡 더 있었다. 요절한 차중락이란 가수가 부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1962년에 발표한 <Anything That's Part Of You>의 번안곡이다. 세상의 반쪽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흥얼거리는 까까머리 중학생은 조숙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끈적거리는 춤 대신 특유의 중저음에 단단히 홀린 녀석은 점점 '올디스 벗 구디스'의 세계에 대책없이 빠져들고 만다.

팝송이란 기막힌 박래품을 난생 처음 접한 건 지금은 일본에 거주하시는 세째 고모 덕이다. 국민학생 때였다. 우리집 근처에 살던 고모 가족이 딴 데로 이사를 간대서 전부터 벼르던 다 낡아빠진 전축을 고모 바짓가랑이 붙들고 통사정해 물려받았다. 고모한테 장기 임대 조건으로 영화음악만 모아놓은 빽판 몇 장도 함께 건네받았는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첫 수록곡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주연한 영화 『블루 하와이』 수록곡인 <Can't Help Falling in Love> 였다. 그러고 보면 엘비스 프레슬리와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았다. 팝송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엘비스였고 사춘기 시절 로맨스 판타지를 꿈꾸게 한 이도 엘비스다. 무의식중에 흥얼거리는 몇 안 되는 팝송의 대부분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불렀던 노래라는 게 공교롭지 않은 이유겠다.

칸초네 노래 얘기하다 말고 멀리 왔다. 엘비스가 사망한 지 44년이나 흘렀다. 음모론 좋아하는 사람들은 엘비스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혹자는 엘비스가 외계인이라고 나부대던데 나가도 너무 나갔다)하는데 1935년생인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로 여든여섯이다. 현역으로 활동해도 거뜬할 나이다. <Heartbreak Hotel>을 부르며 엉덩이를 흔들지는 못해도 <Love Me Tender>로 여전히 여성의 심금을 울릴 수는 있을 텐데. 그가 문득 그립다.

작가의 이전글시 읽는 일요일(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