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애들 물놀이하는 풀장 같이 둥글넓데데한 김장 매트에다 지난 밤 우려낸 다시마 육수를 붓는 것으로 김장은 시작된다. 간 무우, 사과, 배를 헝겁에 싸 즙을 꼭 짜서 붓고 음성 햇고추 빻아넣으면 바야흐로 충청도 김장 양념 고유의 풍미가 더해진다. 액젓과 새우젓, 다진 마늘, 생강, 소금, 조미료, 설탕을 알맞게 넣어 한참을 버무린다. 그런 다음 미리 썰어놓은 무채, 갓, 파를 양껏 넣어 또 한참을 버무리면 김장 양념소가 완성된다. 처갓집 김치가 최고라고 단언하는 데는 양념소가 큰 몫을 한다. 처갓집 양념소에는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재료들로만 이뤄진 천연덕스러움과 팔순 넘은 장모의 오랜 손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 번 맛을 들이면 다른 집 김치는 쳐다도 안 보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꼭 넣을 것만 넣어 만드는 충청도 김치는 특유의 담백함, 소박함이 일품이다.
한나절 내내 배추를 치대고 나면 김장 김치와 푹 삶은 수육, 싱싱한 굴로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온 가족 둘러앉아 거하게 뒤풀이를 연다. 연례행사를 무사히 치뤘다는 안도감과 일 년의 두 번, 장모 생신과 김장날만은 꼭 모여 격조했던 가족 간의 회포를 푸는 정다움이 늦가을 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없는 것보다는 다복하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서면 어김없이 엄습하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자면 처갓집 김장하는 날만 손꼽는다. 갓 담은 생김치, 겉절이, 안 익어 알싸한 무우 섞박지 게걸스레 먹어대야지만 그나마 원기를 회복할 수 있어서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지는 장모 건강을 염려해 각자 알아서 김장하기로 8녀1남이 합의를 보긴 꽤 오래전이었지만 실행에 옮긴 건 작년부터였다. 나로서는 아쉽기 그지없지만 노구를 사리지 않고 몇 날 며칠 애쓰시는 병든 장모를 생각하면 엄부럭 부릴 게 아니다. 가족들 간의 합의가 꼭 아니더라도 작년부터 나는 처가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이용사 면허시험 준비로, 올해는 주말 알바 때문에 시간내기가 어렵다. 안타까운 건 이 업으로 기반 다지기 전에는 처가 갈 엄두를 못 낸다는 점이다. 휴일에 일해야 하는 업종 특성도 그렇고 일천한 업력을 얼른 끌어올리자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 없다는 명분... 하지만 참 가소롭다. 처가와 인연을 맺은 이후로 일 년의 한두 번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꼭 시골 들러 지친 마음 달랬었다. 가겠다면 오지 말라는 사람 없는 거길 스스로 발 끊겠다는 건 무슨 심보인지. 호주머니 좀 넉넉해지면? 그게 언젠데? 도대체 뭣이 중한지도 모르는 본말이 전도된 인생을 또 자초하는 이유가 뭘까? 재주 있었으면 진작에 떼부자됐을 팔자였다. 돈, 부질없는데 말이다.
작년 이맘때 둘째 처형네 보내준 김장 김치 다 꺼내먹고 텅텅 빈 김치 냉장고 보곤 착잡해서 몇 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