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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산보

by 김대일

"차를 탄 사람의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추상화에 가깝지만, 걷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은 세밀화와 같다. 나뭇잎의 색깔과 공기의 온도와 바람의 냄새가 모조리 다 기억난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이 구절을 참 좋아한다. 속도전에 매몰된 채 사는 우리를 꾸짖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찬찬히 디다보면 우리 주변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즐거움이 숨어 있으니 어서 찾아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하다. 일요일 알바를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은 뒤 바람이나 쐬겠다고 밤산책을 잠시 나섰다. 목적지를 정해 놓고 나간 건 아니다. 그냥 발길 따라 나섰는데 집 앞 공원이다. 산지사방에 은행잎 천지였다. 샛노란 낙엽들은 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 천연덕스러웠다. 오늘 출퇴근길, 어저께, 그저께, 그끄저께… 매일매일 이 공원을 지나다니는데도 그때는 안 보이던 은행잎이 내 눈에 지금은 왜 보이는지 궁금했다. 내일 알바를 안 가도 돼서 그런 건지 오늘따라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밝아서 그런 건지 한참을 고민해봐도 잘 모르겠다.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고故 타나구치 지로와 쿠스미 마사유키 콤비가 공동작업한 또다른 만화 <우연한 산보>는 천천히 걸으면서 일상의 따뜻한 풍경을 담아 내는 미덕을 가졌다. 작품의 원작자 쿠스미 마사유키는 스토리 취재를 위해 실제 도쿄 여러 곳을 걸어봤다고 한다. 원작 뒷이야기를 통해 밝힌 취재의 규칙은 이렇다. 첫째, 조사하지 않는다. '관광 가이드'나 '동네 산책 매뉴얼' 따위, 책이나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고 나가지 않는다. 둘째, 옆길로 샌다. 사전에 지도를 보고 간다고 해도 걷기 시작하면 그때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쪽을 향해 적극적으로 샛길로 샌다. 세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시간 제한을 두지 않고, 그날 안에 정하려고 하지 말고 느긋하게 걷는다. 작가가 만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을 주는 산책이다.

밤공기가 은근 싸해 얼마 안 걷다 집으로 내빼긴 했지만 다음에 시도는 해볼 작정이다. 무작정 정처없이 걷다 보면 세밀화 같은 풍경을 만나고 재밌는 뭔가가 숨겨진 샛길이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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