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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일요일(24)

by 김대일

목상木像

김광균

집에는 노처老妻가 있다

노처老妻와 나는

마주 앉아 할말이 없다


좁은 뜨락엔

오월이면 목련이 피고

길을 잃은 비둘기가

두어 마리 잔디밭을

거닐다 간다


처마끝에 등불이 켜지면

밥상을 마주 앉아

또 할말이 없다.


년년세세年年歲歲

세월歲月이 지나는 동안에

우리 둘은 목상木像이 돼가나보다


아내는 안해다

오탁번

토박이말사전에서 어원을 찾아보면

'아내'는 집안에 있는 해라서

'안해' 란다

과연 그럴까?

화장실에서 큰거하고 나서

화장지 다 떨어졌을 때

화장지 달라면서

소리쳐 부를 수 있는 사람,

틀니 빼놓은 물컵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생일 선물 사줘도

눈꼽만큼도 좋아하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

있어도 되고

없으면 더 좋을 그런 사람인데

집안에 있는 해라고?

천만의 말씀!

어쩌다 젊은 시절 떠올라

이불 속에서 슬쩍 건드리면

─ 안 해!

하품 섞어 내뱉는 내 아내!



아내와 나 사이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지난 주 남편에 대한 시를 읊은 김에 예고한 대로 이번 주는 아내를 소재로 한 시 세 편이다. 남편, 아내에 이어 다음 주는 부부가 되겠지만 어슷비슷한 내용을 연거푸 올리는 건 읽는 이도 지겹지만 그걸 올리는 나도 질린다.

시 세 편이 주는 느낌이 어떤가? 나라면 <목상>은 무미건조하고 <아내는 안해다>는 익살스러우며 <아내와 나 사이>는 비관적이다. 시마다 느낌은 다 다른데 공감은 다 간다. 한마디로 현실적이라는 소리. 그러고 보면 부부는 주말 드라마가 아닌 <인생극장> 같은 다큐멘터리에나 어울릴 법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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