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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by 김대일

정오쯤 중2 막내딸 전화번호가 떴다. 전화 올 시간이 아닌데 벨이 울려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놀랐다. 부랴부랴 받으니 느자구없이 이럴 수는 없다고 푸념부터 늘어놓는다. 목소리에 다른 이상은 감지되지 않아 안심했지만 때 아닌 때 연락온 게 의아했다.

-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기말고사잖아. 오늘 시험 다 치고 집으로 가다가 아빠한테 연락한 거야.

시험 중간보고를 한 셈인데 이날 국어, 수학, 도덕 과목을 쳤는가 보더라. 국어, 도덕은 그럭저럭 면피한 것 같은데 문제는 수학이었다. 공부한 데서는 문제가 하나도 안 나와 서술형 문제를 완전 망쳤다면서, 쓰긴 다 썼는데 지난 중간고사보다 점수를 더 바랄 수가 없다는 변명을 해댔다. 저번 중간고사 점수가 100점 만점에 30점대였는데 말이다. 굳이 막내딸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유가 따로 있다. 돌연변이처럼 이과를 지망했던 큰딸은 이과라서 더 비중이 높은 수학 성적이 늘 기대 이하여서 고전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시험 시즌만 닥치면 책 보따리 싸들고 독서실에 처박히기 일쑤인 막내딸도 수학이 늘 넘사벽인 건 수학에 젬병인 아비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밖에는 달리 둘러댈 말이 궁하다. 점수가 어떻게 나오든 전심전력을 기울여 시험 준비를 했다는 데, 말하자면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의의를 두자고 다독여줬지만 그런 점수 안 받아본 사람은 이해 못 할 씁쓸한 뒷맛을 아비란 작자는 또 안다. 수학 빵점을 받은 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대일이 빠앙점'이란 별명이 낙인처럼 붙어 다녔던 아비니까.

고등학교 흑역사를 글로 옮긴 적이 있었다. 다 지난 과거사라고 치부한들 죽어 관 속에까지 가지고 갈 만치 당사자는 옹심을 품고 산다. 그게 치욕이라고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다만 내 얼굴에 침 뱉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걸 다시 들춰내는 까닭은 내 반쪽같은 막내딸을 위해서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수학 때문에 골머리 싸맬 게 뻔한 막내딸이 아비 글을 읽고서 기가 살아나기만 한다면 이 글의 목적은 200% 달성이다.

고2 겨울방학이 끝나자마자 치른 수학 시험 결과는 0점이었다. 정 모르겠으면 답안지에 0 이나 1 숫자만 그려 넣어도 한 문제는 맞춘다는 요행조차 보기 좋게 빗겨나간 참변이었다. 매타작을 기다리는 십수 명에 달하는 수포자들 중에 단연 눈에 뜨였던 건 권한은 없이 반장 시다바리에 불과한 부반장 완장을 내가 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정적인 제자 사랑 덕에 강철 팔뚝을 뽐내는 닉네임이 '베타'인 수학 선생은 예의 혀짧은 소리로 “교직 평생에 부반장이 빵점 받은 놈은 네 놈이 처음이다!”라고 과도하게 분개하면서 뭇 수포자들보다 더 과분하게 사랑의 몽둥이찜질을 해댔다. 엉덩짝이 헌 걸레마냥 너덜너덜해지는 통증보다 이후 벌어질 상황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에 나는 더 골몰했던 것 같다. 교실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2년을 지냈는데 남은 1년을 죄인처럼 지낼 걸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었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그 '베타' 선생한테 야속한 감정은 가시질 않는다. 당시 많이 먹어봐야 삼십 대 초반이었던 선생이 말하는 교직 평생이래 봤자 불과 4~5년밖에 더 되겠나. 일천한 교직 평생을 들먹이면서까지 수학 빵점 받은 부반장이 그리도 충격적이었는지 그때를 되돌아보면 여전히 나는 억울하다.

다른 좋은 면도 없지 않은데 하고많은 것 중에 아비의 저질 수학 능력을 빼다박은 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이란 건 별 게 아니다. 아비는 너희들보다 더 헤매다 한 문제도 못 맞춰 빵점까지 받았지만 이리 잘 살고 있지 않냐고, 그러니 자책일랑 말고 하는 데까지 해보라고, 원없이 애를 썼는데도 결과가 시원찮대도 안 해서 드는 후회는 없지 않겠냐고, 수학 잘한다고 더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무능한 건 더더욱 아니라고(틀에 박힌 멘트라 몹시 진부하긴 하나 실상 그러하니 달리 심박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전전긍긍하는 막내딸한테 고등학교 적 아빠 별명이 '대일이 빠앙점'이랬더니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아무렴 빵점보다 30점 받은 사람이 30배는 더 낫지. 집에 가서 얼른 점심 먹고 독서실에서 공부하겠단다. 다음날 시험 과목 중에 한문이 있나본데 또 한 번 큰 난관이래나 뭐라나. 한문이라면 아비가 한 가닥하는데.이래 봬도 한자 검증2급 보유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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