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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일요일(25)

by 김대일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의 시어는 도회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생경함으로 전위성 내지 현대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신문 기사만도 못한 시라며 경멸했던 김수영을 두둔하지 않더라도 나이 먹어 읽은 박인환 시는 알맹이는 어디다 두고 없이 겉멋만 든 느낌을 지울 길 없다. <목마와 숙녀>에 등장하는 목마, 숙녀, 버지니아 울프, 페시미즘 따위의 시어들이 명료함을 상실한 사어로 전락해 낡은 책장 구석에 처박혀 연명할 뿐이라고 쓸쓸해하는 내가 그 시를 읽기에는 너무 찌들어버린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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