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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by 김대일

야전 교범(Field Manual)은 군 생활의 전반적인 지침서로 'FM대로 한다'는 말은 교범에 나온 매뉴얼을 원리 원칙대로 따른다는 의미다. 무슨 일이건 뼈대가 되는 원리가 있기 마련이고 그걸 기본(기초)으로 해 조리를 터득해 나간다. 기본기라는 게 갖춰진 다음에야 그걸 밑천 삼아 요렇게도 조렇게도 응용을 하고 그러면서 쪽빛보다 더 푸르게 발전하는 기특함을 발휘하기도 한다.(그걸 시쳇말로 포텐 터진다고들 하지) 그러니 어중잽이로 온갖 구박과 천대를 당한다 할지라도 내 머리와 양손에 그 기본이라는 게 완전히 녹아들기 전까지는 참고 또 참아야 한다. 내가 요새 그런 처지다.

제법 깎는 시늉은 낸다는 소릴 듣지만 툭툭 날아오는 힐난이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 하루종일 심난하다. 커트 의자에 앉혀 커트보를 치고 거울에 비친 손님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났다. 스포츠형을 선호하는 이로 통상 18mm 덧날을 바리캉에 끼워 대강 돌린 후 옆머리와 뒷머리를 밑에서부터 명암 층을 내는 작업(그라데이션이라고 부른다)을 해준다. 직전에 원장이 깎아보라고 자리를 비켜 줘서 내가 작업을 한 기억이 났다. 물론 마무리는 원장이 했지만. 이번에도 원장은 '18mm'라고 나즉이 귀띔을 했고 나는 바리캉에 덧날을 끼움으로써 화답했다. 그런데,

- 원장, 나 그냥 간다이. 오늘도 그러면 재미없어. 저번에 아주 조졌잖아.

무참하게 까인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원장은 허겁지겁 작업대에서 나를 밀쳐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손님이 밀린 관계로 곧바로 다음 손님을 앉히고 커트보를 쳤다. 원장은 다음 손님은 내가 맡으라는 의미로 '손님 받으세요'라고 했고 그 말에 기계적으로 다시 머리를 매만지려는데,

- 내 머리 깎을라꼬? 원장 다 깎을 때까지 기다릴끼요.

한다. 앞 손님 엄포에 영 찜찜했던가 보다. 군중심리가 이래서 무섭다. 일순 무르춤한 나는 그 가게에서 가장 고독한 놈이 되고 말았다.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손님들 말본새가 재수없지만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건 아니다. 오래된 단골일수록 원장 기술에 단단히 익어 버려서 어디서 굴러 먹다 왔는지도 모를 신출내기한테 자신의 귀한 머리카락을 맡길 수 없다. 설령 그 신출내기가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부적인 깎새라고 소문이 자자한들 원장과 손님 사이에 맺어진 오래되어서 미묘하기 짝이 없는 가이드라인(여기서의 가이드라인이란 머리카락을 자를 때 기준이 되는 선을 의미한다)을 단번에 파악하기란 쉽진 않다. 즉 손님의 요구사항은 원장만이 잘 알아서 그에 맞춰 요리하는 게 롱런하는 커트점의 영업 비밀인 셈이면서 신출내기가 버거워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깎새의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고수, 대가, 달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기본에 충실하라고. 깎는 행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완전히 내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암만 고난도의 기술을 익혀본들 빛 좋은 개살구밖에 더 되겠냐 입을 모으자고 서로 몰래 모여서 쑥덕공론을 안 해도 공히 내뱉는 진리다. 고로 어떻게 깎느냐 이전에 왜 깎고 무엇을 깎는가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게 바로 기본이라는 소리겠다.

현장에서 연습이란 없다. 실전에 임해서 좌고우면하다간 쫄딱 망하기 십상이다. 어떠한 역경이 닥쳐도 절대 굴하지 않고 구상한 대로 스타일을 완성시키는 억척은 꼭 필요하다. 그 억척을 맷집이라 부른다면 그 맷집은 기본이 갖춰졌을 때 더 단단해진다는 걸 재수없는 손님들을 통해 새삼 뼈저리게 깨닫는다. 분해도 알바를 그만두지 않고 이 꼴 저 꼴 다 싫어 차라리 가게나 차리겠다며 섣불리 나대지 않는 까닭, 아직 멀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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