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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임과 정조

by 김대일

역사학자 이덕일 저서 『사도세자의 고백-그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푸른역사, 1998)는 조선 왕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에 집중한 역사서이다. 정조의 친모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이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묘사한 기록인데 반해『영조실록』에는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로서의 사도세자의 모습, 즉 한 군마가 마구간을 뛰쳐나가 콩밭을 훼손시키자 위사衛士를 처벌하고 밭주인에게 후히 보상하도록 명령한 인물, 백성을 고통에 빠트리는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령한 인물, 온양 읍내의 부로父老들과 이름 없는 선비들을 불러 도타운 말로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한 인물로 표현한 기록이 있어 이 두 기록 간의 간극을 메우고자 저자는 대리청정하던 왕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있던 그 여드레 동안 조정에서 벌어진 일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사도세자의 고백-그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머리말)

사료를 바탕으로 하되 역사학자답지 않은 서스펜스적 글투로 한 번 책을 잡으면 쉽사리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재미를 선사한다. 책은 사도세자를 비극적 죽음으로 몬 조선 후기 정치 난맥상에 비판의 날을 겨눴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즉위 일성으로 대신들을 경악시킨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에 전력을 기울이는 정치가로써 면모가 역력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군주 정조를 유년의 비극을 극복하고 백성을 위한 개혁사상을 받아들여 개혁정치를 밀어붙이는 동시에 고도의 정치 술수에 능한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로 뭇사람들이 인식하는 데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에 기인한 바 크다. 냉철한 위정자, 노련한 개혁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군주였음에도 정사가 아닌 야사 한 꼭지조차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도도한 인생 역정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혹함마저 들어 인간적인 매력을 찾기가 어렵다는 게 개인적인 느낌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물론이고 정조 이산의 삶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단골 소재로 꽤 자주 사용된 걸로 안다.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해 한층 더 자극적인 역사일수록 사람들은 끌리기 마련이니 영정조 시대야말로 팩션 장르의 영원한 화수분이 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무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재창조하는 팩션이라도 대중성에 기울어진 자의적이고 왜곡된 상상력으로 인해 잘못된 역사 인식을 부추기는 위험성이 뒤따를 경향이 있어 특히 주의해야 한다. 그 자체에 맹목적으로 몰입하기보다는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해 팩션 속에 표현된 역사의 다양성을 즐기는 것으로 합리적 재미를 찾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지껄이는 나지만 얼마 전 종영된 팩션 드라마의 최종회에 마음을 그만 앗겼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마저 곱디 고운 <옷 소매 붉은 끝동>의 최종회는 죽은 의빈 성씨 덕임을 잊지 못하는 정조의 절절한 그리움을 나타내면서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마지막 키스를 통해 이른바 새피(sad + happy) 엔드로 마무리했다. 과문한 탓에 여지껏 정조 이산과 의빈 성씨의 관계를 몰랐던 나는 의빈 성씨가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래서인지 매사 적극적이고 활기차게 자기 삶을 주도하는 극중 덕임이 비록 팩션의 영역인 드라마임에도 역사 속 의빈 성씨를 주체적 여성으로 잘 구현해 냄으로써 21세기 청년들을 사로잡았다는 찬사에 전폭적으로 동감한다. 이세영이 보여준 싱크로율 높은 덕임 연기로 역사책에 박제된 의빈 성씨를 역동적으로 소환해내 준 데는 특히 반갑고 놀랍다. 더 두고봐야겠지만 특히 사극 연기 내공이 여간이 아닌 이세영이 그만의 출중한 경쟁력을 갖춘 훌륭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드라마 여주인공에 매료되기는 난생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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