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이 병원에서 퇴원한 지난해 말 이래 일주일의 반은 우리집, 나머지 반은 본가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새벽같이 출근하는 부친을 대신해 주간보호센터 가는 모친의 채비를 도와주기 위함이지만 금~일 알바를 본가에서 출퇴근하는 게 편해서 더부살이한다는 게 더 솔직하겠다. 그렇게 월요일 오후 해운대 집으로 가면 어디 먼 데 출장 갔다 오랜만에 귀가한 듯 되우 낯설다. 건강 문제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지만 고작 몇 달 쉬다가 다시 들어간 새 회사. 왕복 4시간(해운대<->하단) 출퇴근 시간으로도 모자라 야근까지 겹쳐 아침 7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서면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게 일상이 된 마누라다. 2학년을 채우자마자 휴학계를 내고서 본격적으로 약학대학원 편입을 준비하려 새해 벽두부터 전문 학원에 처박혀 사는 큰딸도 새벽밥 먹고 나가 자정 넘어 귀가하는 게 제 루틴이라고 했다. 펜싱 연습 끝나고 학원 공부까지 마친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대문 열고 들어오는 막내딸 얼굴이나 자기 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모두들 바쁘게 사는 중이다. 아니 악전고투 중이다.
배즙을 데우고 사과 반 쪽을 까서 출근 준비하는 마누라한테 내미는 게 아침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다다. 말수가 준 마누라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런 마누라 얼굴을 보는 건 고역이다.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내가 마누라를 혹사시키는 무능한 남편이라 질책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경제적 금치산자나 다름없었던 남편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끌고 간 지 이미 오래다. 자식새끼들 얼굴에 그늘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버티지만 나이는 못 속이는지 여기저기서 삐걱대고 고장나기 일쑤인 유리 몸이 되어 버렸다. 잠 자는 시간을 뺀 하루 전부를 내맡긴 회사에서 주는 임금이 얼마인지는 안 물어봐서 모르겠지만 썩 대단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그거라도 받아야 가계를 겨우 지탱할 수 있으니 당장 손 떼기도 어렵다. 수입이 변변치 않은 나로 인해 빚어지는 마누라의 딜레마다. 그 딜레마가 원죄처럼 또 나를 늘 옥죈다. 어제 아침 출근하는 마누라가 혼잣말하듯 툭 내뱉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 지영(큰딸)이 밑으로 한 달에 백 만원이야.
뒷말은 안 들어도 알아들었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지출에 백 만원이 더 불어 불감당이라고, 이 모든 부담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부친다고. 무심한 놈이 아니건만 나는 또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만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가게를 열겠다는 생각에 유보적이었다. 숙련된 기술이 아니고서는 가게 존속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게 이 바닥이라는 쓴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까닭이다. 평균 이상은 놀리는 기술이라는 주위 평판에도 불구하고 개업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던 건 남들이야 뭐라고 떠들든 내가 나를 못 믿어서 내 기술에 모지도록 박한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가게를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고 누가 대신해 줄 것도 아니니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늦어도 이삼 년은 더 밑바닥을 다지겠노라 나름 주판알을 튕겨 본들 피곤에 전 병색까지 엿보이는 마누라 얼굴을 마주대하면 내가 혹시 부자 몸 조심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몹시 괴로웠다. 늑장을 부릴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닌데 이리도 굼뜨는 건 결국 가족들 희생시켜 나 좋자는 게 아니면 뭐냐는 죄스러움.
틈틈이 가게 열 자리 알아보러 돌아다니는 중이다. 부친의 안목은 유명짜한 소상공인 창업 컨설턴트 못지않아서 부친이 일러주는 동네를 찾아 알맞은 데를 물색 중이다. 빠르면 올 봄을 개업 시기로 잡고 다리품을 팔고 있다. 부친의 영도 하에 개업이 진행되겠으나 운영은 오롯이 내 몫이다. 덜 익은 기술은 맨땅에 헤딩하며 보충해 나갈 작정이다. 분명 녹록지 않을 줄 알지만 연습한답시고 시간만 축내는 건 더 이상 사치일 뿐이다.
마누라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를 보냈다. 궁색한 짓이었지만 힘겨운 출근길에 어떻게든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행여 립서비스로 절하될까 두려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게 자리 알아보는 중이다. 올 봄에 차릴 생각이다. 넋 놓고 시간만 축내는 건 아니니 염려 마시라. 당신 부대끼는 모습을 내가 더 못 보겠으니 가게 차릴 때까지만 애씁시다. 당신은 좀 쉬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