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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들

by 김대일

오래된 usb를 정리하다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에 큰딸에게 썼던 글을 발견했다. 글까지 동원해 환심을 살 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을 텐데 통 기억이 없다. 다만 깍듯하게 경어를 쓰면서까지 아이를 설득시키려는 노력이 다시 보니 되우 멋쩍다. 9년 전이면 큰딸이 초등학생이었을 무렵인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아는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대서 위문하러 들렀다가 봤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머리 짧은 사내가 환자복을 입은 아줌마의 손을 꼭 쥐고서 병원 복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더군요. 환자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환자는 보호자인 듯한 사내한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앞만 주시할 뿐이더군요. 사내 역시 혼자 쫑알거리는 게 환자의 무심함에 뒤지질 않습디다. 그 광경이 하도 이상해 보여서 유심히 살폈더니 같이 걷는 아줌마 환자한테 쉬지 않고 말을 거는 거였지요. 대꾸는커녕 듣는 둥 마는 둥 걷는 데만 정신이 팔린 아줌마 환자, 듣든지 말든지 연신 씨부렁대는 사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슬쩍 엿들었습니다.

“울 엄마가 해주던 게국은 정말 맛있었어. 요즘 같이 입맛 없을 때 된장 넣어 끓인 게국에 밥 비벼먹으면 그만인데.”

“울 엄마는 진짜 통뼈야. 살면서 엄마가 아픈 적이 한번도 없었잖아. 그러니 거뜬히 털고 일어날 거야. 난 울 엄마를 잘 알아.”

둘의 관계를 알고 나니 가슴이 찡해지더군요.

병문안을 마치고 병동을 빠져 나오려는데 낯익은 얼굴이 비치길래 그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어요. 아까 본 아줌마 환자였습니다.

“재훈이는 군대에 있어 못 와요. 중대장하는 대위 이재훈이가 우리 아들인데 훈련 때문에 엄마가 아파도 못 온대요. 재훈이가 보고 싶은데 재훈이가 못 온대요.”

등을 지고 서 있는 어떤 남자한테 아줌마 환자가 흐느끼듯 얘기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아줌마 환자의 말을 듣던 그 남자는 다름아닌 아까 그 사내였습니다. 사내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는 “엄마!” 하고 울부짖더군요. 급성 뇌출혈로 인해 긴급으로 개두술을 받게 되면 일시적인 기억상실이 일어나는 환자가 간혹 나타나고 상태가 심하면 갓난아이 지능으로 변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줌마 환자가 그런 증상인지 안타까운 광경에 숙연해집디다.

아빠 욕심은 우리 큰딸과 행복한 추억을 평생토록 많이 쌓고 싶은 겁니다.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져서 느끼는 행복도 좋지만 소소하면서 소중한 현실의 순간순간을 추억들로 엮어 우리 가족 행복 바구니에 담아 나가기를 아빠는 더 바랍니다. 우리 큰딸 착한 성정은 커서도 바뀌지 않으리라 믿지만 아빠는 우리 큰딸과 전보다 조금만 더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싶군요. 또 서로 공감할 거리를 많이 만들고 싶어요. 아빠가 더 신경쓸 테니 우리 큰딸도 아빠와 더 많이 얘기하고 웃으며 사랑하길 바랍니다.

아줌마 환자와 사내에게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했습니다. 아줌마의 애틋한 자식 사랑도 사랑이지만 자기 엄마를 절절하게 바라보던 사내의 눈빛, 모자가 공유한 지난날의 추억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아름답기에 그들의 앞날에 제발 행복만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병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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