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밤. 일기예보에도 없던 가랑비가 내려 하릴없이 젖은 채로 귀가를 서둘렀네. 장산 지하철역을 나와 집으로 가는 지름길로는 그 길이 딱이라 그날도 심상하게 들어섰지. 어른 보폭으로 300 걸음이 채 안 되게 짧은 그 길은 지하철을 애용하는 주민이면 누구나 왕래하는 그냥 산책길이지. 이슥한 밤에 비마저 흩뿌려 을씨년스러운데다 삼경三更도 한참이라 밤고양이 자취조차 끊기니 밤길 적막하기가 그지없더구먼. 길을 걸을 때 눈을 내리깔고 종종걸음을 보채는 게 버릇인 탓에 애시당초 주변 경관을 살피는 재미를 영 모르는 사람인지라 그날도 제 버릇 개를 못 줘서 발아래만 응시하며 잰걸음을 재촉했을 뿐이었다네. 그런데 느닷없이,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추고 여태 걸어왔던 길, 앞으로 가야 할 길, 또 그 길을 에워싼 밤의 물상들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길은 지하철역 쪽 어귀로부터 걸어갈수록 경사가 완만하게 올라간데다 약간 휘어져 나있다네. 행인들 오고가기 편하게 두 길로 나눠졌고 길바닥은 폭신한 탄력이 그만이지. 나눠진 길 사이 공간으로 가로등과 느티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지어 서 있어. 길 양 가장자리는 이름 다른 아파트 단지가 서로 마주보고 서있고 조경 차원에서 심었을 다채로운 아름드리나무들이 길 가운데 가로등, 느티나무와 연리지마냥 가지와 잎들이 맞닿아서 천연 아치를 이루며 행인을 내려다본다네. 흩뿌리던 는개가 머금은 안개는 가로등을 휘감아 음산한 코발트빛을 분사시키니 그 기이한 풍광에 나는 왜소한 몸뚱아리를 나부죽이 부복하여 순종하고 말았네. 야밤의 고적함이 거역하기 힘든 그들의 위엄을 시샘하듯 알싸한 밤내음을 뿜어대는 도상에서 나는 말로 표현 못할 청량감에 취했네. 가슴에 덕적덕적 껴 있던 잡된 상념의 더께를 훌훌 털어내 나신裸身이 된 듯 홀가분해진 나는 그들이 내뿜는 경이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 마침내 정화되었지!
어제와 오늘, 지향하는 바 없이 무한 반복의 하루일 뿐인 내일이 일상의 전부라는 무기력함으로 내 인생 스케치북은 무채색으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다. 흥미진진, 기상천외가 성가시기만 할 뿐인 지금 꼬락서니가 진짜 내 모습이 아닐진대 절망이란 감정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비어 있는 궤짝마냥 마음은 휑뎅그렁하다. 자네는 우리의 젊은날을 기억하는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마구발방했지만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세상의 무수하고 다양한 현상을 목도하고 감응하기에도 모자랐던 우리의 젊은날 말일세. 때로는 열정으로 벅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 사랑했던 격정의 향연. 역동적인 에네르기로 충만했던 그 시절 우리들이었건만 창창했던 청춘의 환희는 어느새 고사되었고 찬란했던 우리의 이상은 척박한 물질계의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가 버렸네. 무상한 시간은 감정마저 무뎌지게 만드는지 거침없던 청춘의 오기는 가뭇없고 세태에 순응하는 얼치기 보수주의자로 변모해 고만고만하게 호구를 연명할 뿐이지.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진저리가 나면 미친 척 비정한 세상에다 짱돌 던져 왜 이 모양이냐며 저주라도 퍼붓고는 문뱃내 진동하도록 퍼마셔도 보지만 찜부럭 내던 꼬마가 제 풀에 수굿해지듯 어느새 권태와 무기력한 일상으로 리셋하고 마는 단세포적인 잉여인간. 과연 내게 생동하는 삶의 감정이 남아 있기나 한 걸까? 하늘과 땅이 툭 트인 요동벌을 바라보며 '크게 통곡해볼 만하다!'란 연암의 호호탕탕까진 아니라도 똑같은 광경을 보고도 소 닭 쳐다보듯 멀뚱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일세 그려.
내려앉은 밤안개를 젖히고 녀석이 묵직한 중저음으로 나를 도발시켰네. 지금이야말로 온몸으로 느끼고 즐길 때라고. 침잠하고 은폐됐던 온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이 밤의 모든 물상과 교감하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네.
‘네 경직되고 상처받은 영혼의 그림자여, 나에게로 바투 다가서라! 백주에 뜬 눈으로도 보지 못하는 길 위의 형상을 칠흑보다 어두운 이 어둠을 빌어 바야흐로 목도할지니. 이 밤이야말로 우리를 보듬는 요람일 테다. 자, 눈을 감아 마음 가는 대로 바라보고 코로는 가장 끼끗한 공기를 들이쉬게 한껏 벌렁거려라. 입은 가슴에 사무친 온갖 독소를 내뿜고자 입아귀가 째지도록 크게 벌리며 치명적인 세이렌의 목소리조차 아름답게 듣게 두 귀를 쫑긋 열어둬라. 하여 모든 것에 감응하도록 온 감각을 곤두세울지니 마침내 오감이 충만해지면 너의 마음은 소우주가 되고 너를 중심으로 세상은 움직이며 너를 둘러싼 모든 존재와 통하리라. 나는 너와 언제나 더불어 함께 할지니 고되고 힘겹다면 너의 두 어깨를 나에게 기대어도 좋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길을 걷네. 그날 이후 딱히 변한 건 없네. 다만 그날 이후 그 길에 접어들라치면 부러 처지게 걸으면서 도상의 물상들을 훑어 보는 버릇은 생겼네. 자네와 마찬가지로 이 신기한 체험을 애들 엄마한테 들려줬더니 처음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며 같잖아 하더니 퍼뜩 생각나는 게 있는지 포털 창을 열어 뭔가를 열심히 찾더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득의만면한 표정을 짓고서는 그걸 내 앞에 보여주는데,
피톤치드(phytoncide)
1973년 러시아의 생화학자 토킨에 의하여 명명되었다. 식물이 병원균, 해충,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로,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 이에 여러 상품들에 피톤치드의 효능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