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모순적인 어법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진실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논리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일견 모순적인 언어 혹은 시적인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을 생각해 보자.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오늘 하루 죽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게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게 곧 살아가는 것이기에, 인간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 살아간다는 말과 죽어간다는 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근본 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내부에 화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열망이 공존할 수도 있다. 영화 <애니홀>에서 주인공 앨비 싱어는 불평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고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장수하려고 든다고. 그런 것은 마치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추가 주문을 하는 일과 같다고. 실로 그렇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인생이 고통의 무한리필이라면, 리필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장수를 원한다. 고해라는 인생의 술잔을 한 잔 더.
『논어』에 따르면, 공자 역시 그러한 모순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는 이상적인 질서가 구현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분투했다. 『논어』 미자微子 편은 말한다. “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공자도) 이미 알고 있다.(道之不行已知之矣)" 이것은 공자를 모순적이며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는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전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견 비합리적인 행동은, 눈앞의 손익을 따지는 이는 꿈꾸지 못할 영웅적인 광채를 공자에게 부여한다.(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2019)
인생 죽으면 그만인 줄 뻔히 알면서 우공이산하려는 인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결말이 비장한 영화나 드라마 라스트 신에서 숨 넘어가기 직전인 주인공이 치는 대사는 대체로 진부하다. 나는 뜨지만 너희들은 남지 않냐고, 내 죽음이 헛되지 않게 너희들이 도와달라고. 이해할 수 없다. 죽음은 의식의 소멸일진대 무슨 뒷감정이 남아 후사를 도모하는가. 지독한 페시미스트는 사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왕 세상에 났으니 멸할 때까지 사는 것 그뿐이다. 하고 보면 세상의 갖은 부귀영화가 덧없기만 하니 차라리 질박한 금욕주의자로서의 면면이 더 어울릴 법하다. 하루하루 죽어가면서 오래 살겠다고 뻗대는 거나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전진한다'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모순의 저의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사는 게 지금보다 덜 미온적일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