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죽자사자 크게 우긴 적이 있었다. 악착스럽지 못한 성정인데 끝까지 고집을 부린 건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들이당짝 들이미는 반론에도 전혀 꿈쩍않을 확실한 근거를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는데 토론의 장을 손쉽게 평정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놈의 성마른 성미 탓에 합리적 주장은 어거지로 변질해 급기야 엄부럭이나 떠는 철없는 떼쟁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우김질에도 기술과 기술을 연마할 훈련이 필요하다.
우김질도 찬찬히 관찰해 보면 자기 주장을 우기는 방법도 각인 각색인데, 대개 다음의 대여섯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작정 큰소리 하나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방법입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고함 때문에 다른 사람의 반론이 묻혀버리는, 이른바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우격다짐입니다.
둘째는, 그 주장에 날카로운 신경질이 가득 담겨 있어서 자칫 싸움이 될까 봐 말상대를 꺼리기 때문에 제대로의 시비是非나 쟁점에의 접근이 기피됨으로써 일견 부전승不戰勝의 외형을 띠는 경우입니다.
세째는, 최고급의 형용사, 푸짐한 양사量詞, 과장과 다변多辯으로 자기 주장의 거죽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감히 물량 시대物量時代와 상업 광고의 아류亞流라 할 만합니다.
네째는, 누구누구가 그렇게 말했다는 둥, 무슨 책에 그렇게 씌어 있다는 둥, 자체의 조리나 논리적 귀결로써 자기 주장을 입증하려 하지 아니하고, 유명인, 특히 외국의 것에 편승, 기술 제휴(?)함으로써 '촌놈 겁주려는' 매판적 방법입니다.
다섯째는, a₁+ a₂+ a₃+… an 등으로, 자기 주장에 +가 되는 요인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α'의 방법입니다. 결국 - 요인에 대한 + 요인의 우세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법인데, 이는 소위 헤겔의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필연성의 일종이긴 하나 필연성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자연 과학에 흔히 나타나는 기계적 사고의 전형입니다.
여섯째는, (자기의 주장을 편의상 '그것'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것'과의 반대물反對物을 대비하고, 전체 속에서의 '그것'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그것의 객관적 의의를 규정하며,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친 시계열상時係列上의 변화 및 발전의 형태를 제시하는 등의 방법인데 이것은 한 마디로 다른 것들과의 관계와 상호 연관 속에서 '그것'을 동태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여섯 번째의 방법이 가장 지성적인 것임은 물론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993, 52~53쪽)
우김질의 범주 중에서도 가장 하수라고 할 첫째와 둘째가 한데 뒤섞여 우겨댔으니 그 미욱하고 데퉁궂은 꼬락서니에 망신살만 뻗쳤다. 신영복 선생은 우김질 중에서 가장 지성적이면서 최고의 형태로써 여섯째를 지목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전제를 달았다.
그러나 저는 이 여섯 번째의 방법이 난삽한 논리와 경직된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고 생활 주변의 일상적 사례와 서민적인 언어로 나타나는 소위 예술적 형상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가히 최고의 형태로 치고 싶습니다.(같은 책, 53쪽)
이왕에 우기려거든 생활밀착형 수작을 동원해 극적으로 우김으로써 좌중이 가히 우길 만하다는 수긍이 절로 들게 만들어야 우김질의 고수인 것이렷다. 근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선생은 아퀴 짓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 주고 끈기있게 기다려 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는 주장과 주장의 대립이 논쟁의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친구가 서로 만나서 친구 따라 함께 강남 가듯 춘풍 대아春風大雅한 감화感化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군자 성인지미君子成人之美, 군자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며, 상선 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순조롭기가 흡사 물과 같다는 까닭도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같은 책, 53쪽)
그러고 보면 우기는 사람은 우기느라 셈평할 여력이 없지만 한 켠에서 진득하게 듣고만 있으면서 조정의 기회를 엿보다가 촌철살인의 비평으로써 난상 토론을 일거에 갈무리하는 자야말로 그 자리의 진정한 승자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