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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r 03. 2022

쉽게 변하지 않는 것

   나는 내가 봐도 좀 이상한 놈이다. 전철 좌석이 뻔히 비었어도 구석진 좌석이 아니면 아예 서서 가버린다. 버스도 마찬가지로 늘 앉던 좌석이 아니면 안 앉는다. 외출 직전 가스레인지 가스관 밸브를 내 손으로 잠궜는데도 잠금 여부를 확인하려고 계속 만지작거리질 않나 냉장고 문은 닫혔는지 콘센트에서 코드는 뺐는지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지는 않는지 재차 삼차 확인하느라 바로 현관문을 나서는 법이 없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돼서 또 집으로 들어가 일일이 사진을 찍어 놓아야지 그제서야 겨우 발걸음을 돌린다. 병적인 결벽증이자 지독한 조바심의 극치다.

   사람과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내 쪽에서 먼저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겠다고 강다짐해도 막상 당사자를 앞에 두면 두근반세근반 미적대기만 하다 마음먹은 걸 접는다. 싫어도 싫다는 말이 차마 나오질 않아 속만 문드러지다 만다. 근데 어쩌면 내 속엔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가 공존하는지도 모르겠다. 해소하지 못한 울분이 폭발하는 순간 내 입에서 떠난 말이 상대방 가슴에 들어박히는 고약한 비수로 변하면 나도 나를 제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파괴적인 기질이 괴물처럼 나타난다.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관계는 파탄이 나고 그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소거된다. 하여 일어날 파국을 미리 염려하는 나는 피차를 위한 유익한 방법으로 내 입을 닫아 거는 거라고 판단해 곤란함을 일단 넘기고 보는 것이다. 나로서는 미봉책이자 최선책이다. 이런 경향은 지극히 후천적으로 길러진 방어 기제임이 분명하다. 충분히 자기를 제어할 줄 알고 책임질 줄 아는 연치였음에도 번번히 주워 담지 못할 과오를 범하고서 주눅이 들어 버려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를 도려내지는 못한 채 기껏 대책이라는 것이 오는 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회피일변도가 점점 버릇으로 굳어져 버려 지금에 이르렀다.

   가게를 새단장하는 공사가 3/7에서 3/2로 변경되면서 개업 준비 일정이 전반적으로 당겨졌다. 공사를 감독하고 관공서 서류 제출은 물론 여기저기 주문한 물품 정리까지 하자면 아무래도 붙박이로 가게에 내내 붙어있어야 하니 부친은 원래 3월 둘째 주까지 하기로 되어 있는 알바를 첫째 주로 종료하라고 명령하셨다. 운은 띄어보겠지만 원장 성미에 호락호락 수긍할 것 같진 않아 그제 저녁부터 조바심이 도져 끙끙 앓았다.

   개업 일정이 앞당겨진 사정을 이해해 주십사 요청했는데 순순히 받아들일 듯싶더니 내가 나가면 새롭게 진용을 갖출 평일, 주말 알바 샘들한테 일정 변경이 가능한지 의향을 물어본 뒤 결정하자며 원장은 뜸을 들였다. 공교롭게도 알바 샘 둘 모두 통화가 안 되자 성미 급한 원장은 두 사람이 난색을 표할 게 뻔하니 원래대로 3월 둘째 주까지 일하는 걸로 알고 있겠다며 의뭉스럽게 낙착을 보려 했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얼버무리는 원장의 화법을 익히 알고 있는 바 그에 대한 대비를 안 한 게 아닌데도 뚜껑이 확 열리듯 화가 치받았다. 끝내 분을 못 참은 나는 결국 포효하듯 내질러 버렸다.

   - 원장님 때문에 개업이 늦어지면 책임질 겁니까? 여지껏 군소리 안 하고 일했으면 한번쯤 내 사정도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원래대로 인수인계해주는 게 이 바닥 상도인데 왜 자기 생각만 하는냐고 원장이 따졌다.

   -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동안 쌓인 게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그렇게 참았던 나를 보고 이기적이라고요? 나한테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닙니다. 다음 주 절대 안 나옵니다!

   나하고는 말이 안 통하니 부친한테 연락해 상의 후 결정내리겠다면서 일방적으로 뭉갰다(전에도 밝혔듯이 부친과는 구면이다). 거기서 더 들이받다간 무슨 험한 꼴이 연출될지 몰라 나는 입을 닫았고 퇴근 전까지 묵언했다.

   전화로 다투는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부친과 통화 중인 게 분명했다. 그러고 얼마 뒤 부친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까지만 일하고 기구 다 챙겨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부친과 협의하겠다더니 불화만 심화된 꼴이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한결 직수굿해진 원장이 오늘까지만 일하는 걸로 부친과 얘기가 되었다면서 개업했다고 문자를 보내면 들르고 안 보내면 안 가겠다며 제법 덕담 비스무리한 걸 건넸다. 다혈질적인 원장의 기질만큼 냉온탕을 오가는 심경의 변화무쌍함은 알바를 끝내는 날까지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손님을 보낸 후 짐을 주섬주섬 챙겨 가게를 나서는데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말로는 유시유종을 씨부렁대지만 늘 이런 식으로 끝났다. 똥 누고 밑 안 씻은 것 같은 찝찝함 때문에 지난 일 년 동안 내 역할에 충실했다는 자부심이 송두리째 구겨진 양 참담했다. 만약 내 사정의 불가피성을 논리정연하고도 절도있게 피력했다면 원장한테 핏대 세워가며 얼굴 붉힐 것까지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더 야무지고 냉철하게 선을 그음으로써 원장으로 하여금 결별도 개운할 수 있다는 신선함을 선사할 수 있었을 테고 돌아오는 일요일 모든 일을 끝낸 뒤 쿨내 진동하는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러질 못하는 내 한계를 너무도 잘 알기에 소극적 사보타주로써 침묵만이 조자룡 헌 창 쓰듯 매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유일책이라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 사실에 몹시 답답하고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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