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의 <맨 처음 고백>을 우연히 듣다가 뭔가 퍼뜩 스쳤다. 대학 시절 중병을 앓듯 외사랑하던 사내가 고백다운 고백도 못 해보고 여자한테 차인 일화가 불쑥 떠올랐고 그걸 재료 삼아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 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게 작년 3월의 어느날 일이었다.
신승훈이 노래한 <보이지 않는 사랑>이 실제 일화에서는 두 남녀의 관계를 규정짓는 상징이었지만 막상 내가 그들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송창식의 <맨 처음 고백>이었다. 사랑 고백은커녕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듯 다른 사내와 사귄다는 통보를 여자로부터 듣게 되는 한 사내의 심정이 송창식의 목소리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기 때문이겠다. 그러구러 사반세기가 지난 뒤 두 남녀는 동기 송년 모임에서 재회했다. 그 자리에 동석하지 못한 나는 두 남녀의 심경을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혹자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주 오래전 치기 어린 한때라며 무덤덤해할지 몰라도 내가 그 남자라면 참으로 아련하고 복잡미묘하겠다. 청춘의 한때를 정념으로 만판 불살라 버렸는데 그 자국이 세월 흘렀다고 어디 그리 쉽게 아물겠는가. 하여 내 가상의 이야기의 결말은 지극히 위선적이다. 그래서 너무 재미가 없다.
그럼에도 추석 연휴 지난 뒤로는 손님 발길 뜸하고 글감마저 달리는 바람에 오늘은 예전 글을 살짝 고쳐 다시 올리겠다. 그걸로 퉁치련다.)
김 씨네 이발소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번 먹는데 하루 이틀 사흘
돌아서서 말할까 마주서서 말할까
이런 저런 생각에 일주일 이주일
맨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이 들어라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화를 내면 어쩌나 토라지면 어쩌나
눈치만 살피다가 한 달 두 달 석 달
맨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이 들어라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내일 다시 만나면 속시원히 말해야지
눈치만 살피다가 일 년 이 년 삼 년
눈치만 살피다가 지내는 한평생
에에에 에 에 헤
- 송창식 <맨 처음 고백>
1991년 겨울, 퇴근을 알리는 싸이렌이 울리고 공장문이 활짝 열리자 완구회사 직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 무리에서 그는 그녀를 금세 찾는다 기가 막히게. 여름에 이어 겨울 방학에도 그녀는 완구회사 생산라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여름, 겨울 안 가리고 그녀가 공장에 일하러 간 이래로 하루도 아 빠지고 퇴근시간에 맞춰 그녀를 기다렸다. 피곤해하는 그녀의 귀가를 돕는 보디가드를 자처하면서 말이다. 가던 길 틀어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만도 한데 아르바이트가 고됐던 그녀는 퇴근하는 즉시 집으로 가길 원했다. 그래도 그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녀를 매일 본다는 자체만으로 행복했으니까. 바라는 건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녀가 어째 이상하다. 그가 기다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가 서 있는 곳 맞은편으로 걸어 가려고 하니까. 그녀가 향한 곳에는 언젠가 통성명을 한 적 있는, 낯이 익은 같은 또래 사내가 서 있었다. 법학과에 다닌댔지 아마? 한때 수재 소리를 들으며 서울대 법대 진학이 유력했지만 느닷없는 질풍노도의 일탈로 금쪽같은 고교 시절을 날려 먹었음에도 그와 그녀가 다니는 지방 국립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자마자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라는 사내는 호리낭창한 몸매에 똑부러지는 인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들 셋은 처음엔 견고한 정삼각형의 꼭지점 같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한 꼭지점이 다른 한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지더니 구도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석양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만 멍하니 보던 그가 발길을 돌렸다. 몇 발자국 걷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였다. 그녀는 말없이 CD 한 장을 건넸다. 신승훈 2집 앨범이었다. 그날 밤 그는 강원도 정선으로 떠났다.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김에게 광부가 되겠노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김 씨네 이발소> 주인 김 씨는 가게 문을 저녁 7시에 열어 새벽 1시에 닫는다. 같은 건물 2층의 <대성이용학원>까지 운영하려다 보니 야간 장사가 고육책일 수밖에 없다. 2년 넘게 이런 식으로 두 점포를 꾸리고 있지만 김 씨는 견딜 만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요양 중인 이용학원의 원주인인 이 원장을 떠올릴 적마다 드는 책임감 때문에라도 지금의 강행군을 그만둘 수가 없다. 5년 전 김 씨는 이 원장 학원을 찾았다. 삼십 년이 넘는 업력을 자랑하는 <대성이용학원>은 이용사 자격증 취득은 물론 자격증은 보유했지만 실무가 약한 사람들의 이용 기술을 짧은 시일 내에 부쩍 올려 주는 학원으로 입소문이 자자했다. 세련과 고급이란 미명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이용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득세하는 바람에 사세가 많이 쪼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이 원장이 이 바닥의 마이스터라는 사실만은 부인하진 못했다. 김 씨가 이 원장 수하에서 이용사 면허증을 따고 이용 실무까지 섭렵하던 어느 날, 이 원장이 쓰러졌다. 중풍이 들었던 게다. 가까스로 회복되었지만 후유증이 심했다. 재활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왼쪽 팔다리가 예전같지 않았다. 특히 빗을 잡아야 하는 왼손이 심하게 떨렸다. 원장 부부는 낙향해 요양을 결심했고 떠나기 전 이 원장은 김 씨에게 부탁했다.
- 그만한 기술이면 학생들 가르쳐도 손색 없다. 그러니 분신 같은 내 학원을 너한테 맡긴다. 듣기 싫겠지만 오래전 네 아버지와 했던 약속도 이 결정에 크게 작용했다. 꼭 돌아오마. 그때까지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그리고 건물주한테 부탁해서 1층 공실을 이발소로 쓰겠다고 빌려뒀다. 너도 먹고살 땟거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1층은 네 가게니 네가 알아서 해라.
시침이 밤 9시를 가리킬 즈음 10평 남짓한 <김 씨네 이발소>로 한 손님이 들어왔다. 보름 정도 기른 머리를 상고로 단정하게 깎아 달라고 했고 짙은 갈색빛 도는 염색까지 주문했다. 가게에는 TV가 없다. TV를 얹어 놓으면 딱 좋을 선반에는 요즘엔 흔치 않는 라디오와 카세트, CD 플레이어가 겸용인 전축이 놓여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던 손님이 김 씨한테 말을 걸었다.
- 신승훈 2집이네.
- <보이지 않는 사랑>. 내 취향은 아니지만.
-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틀었지?
- 재밌잖아. 걱정마라. 네가 알고 나도 같이 아는 사람들 중에 네가 갑자기 휴학계 내고 광부되겠다고 정선으로 떠난 까닭을 신승훈 2집에서 짐작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 알면 어때서. 이 나이에 뭐가 창피해 비밀 타령일까.
앞머리와 정수리 지간을 우선 잡고 바리캉과 빗을 사용해 오른 옆머리로부터 빙 둘러가면서 말끔하게 숱을 쳤다. 염색보를 두르고 브러쉬로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바르면서 김 씨가 말했다.
- 정아가 오늘 낮에 왔다 갔다.
흠칫 놀라는 사내. 애써 무심한 척하지만 어색하다.
- 이용사 자격을 땄으면 하더라.
- 그 잘난 변호사 사모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이발사 자격증인고?
- 몰랐냐? 김 변하고 이혼한 지 꽤 됐는데.
- 왜?
- 바람 피운 게 들통났나봐.
- 죽고 못 살듯이 할 땐 언제고.
김 씨가 그의 안색을 살핀다.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것 같았다. 생각이 많아질 때 보이는 그의 버릇이란 걸 김 씨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 위자료로 한몫 챙겼겠구만. 귀책사유가 배우자한테 있으니.
- 김 변 개털이란다.
- 왜?
-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팔자에도 없는 사업 밑천 대다가 다 털어 먹고 그것도 모자라 끌어땡긴 빚이 불감당이래나 뭐래나. 집은 저당잡힌 지 오래고 앞으로 변호사 짓도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고.
- 애들이 둘이랬나?
- 그러니 큰일이다. 남편 벌어다 준 돈으로 살림만 하던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가 참 고생이겠다.
- 근데 왜 널 찾아왔을까?
-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를 찾아온 게 아니고 원장님을 찾아온 거지.
염색방을 한다는 아는 언니가 조언해줬다. 미장원보다는 염색방이 기반 잡기에는 더 낫다고. 남자 손님 염색을 주로 하되 간단하게 머리도 깎아 줄 정도 기술만 배우면 된다고. 그러자면 우선 자격증부터 따야 했다. <대성이용학원> 이 원장이 이 방면에서는 유명짜하니 자격증 따러 간 김에 실무 기술도 배워 두라고. 그길로 학원을 찾았다. 재활 차 낙향했는데 언제 복귀할지 난망하다고 원장 대리라는 이가 전했다. 김 씨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누군지 잘 안다. 우리 셋은 같은 대학 봉사 동아리에서 만났다. 신입생이던 1학년 때는 늘 붙어다녔다. 같이 어울려 MT도 가고 봉사활동도 다녔다. 강의 빼먹고 낮술 마시다 인사불성이 돼 집에 업혀서 들어간 적도 있었다. 김 씨가 엄마한테 호되게 꾸중을 듣고 있을 때 나를 업은 그의 목덜미로 줄줄 흘러 내리는 땀과 그 땀으로 축축해진 옷에서 풍기는 땀냄새가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김 씨와 그는 단짝이었지. 김 씨를 바라보니 그가 그리워졌다.
강원도 정선으로 떠난 까닭은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갱도 안에서 석탄 캐는 일이 속 편할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나는 지나치게 순진무구했는지 모른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맹목적인 이끌림으로는 충분치 않은 물밑 저의까지 충족되어야지 성립하고 유지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일까 나는? 탄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땅밑으로 꺼져가는 내내 나한테 묻고 또 물었다. 이듬해 나는 자원 입대했다. 강원도 동북 전방부대로. 27개월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복학했다. 동아리에서 만난 여자 후배와 교제하다가 그녀가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해 수도권 학교로 발령날 즈음 결혼했다. 나는 이미 서울에서 대기업 계열 IT 서비스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결혼 생활은 평탄했다. 딸과 아들을 낳아 잘 길렀고 회사에선 승승장구했다. 간혹 학창 시절 친구들이 그립기도 했지만 서울에 사는 몇몇 친구와 아주 가끔씩 만나 회포를 푸는 걸로 대신했다. 그러다 지병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랜 병구완에 지친 어머니는 당신이 의지하던 종교로 귀의할 걸 결심하고 장남인 내게 통보했다.
- 외딴 절에 틀어박혀 밥이나 짓고 허드렛일 하는 불목하니로 살다 죽으련다.
보살이 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둘뿐인 자식들에게 모두 넘기셨다. 부산에서 아버지 회사를 이어가던 동생마저 경영권을 내게 넘겼다. 이제부터 자기도 온전하게 삶을 누리며 살고 싶다면서. 아내가 부산 발령을 신청했다. 객지 생활에 지쳤고 친정집 가까이서 지내고 싶다면서. 그들의 요구를 억누를 명분도 의지도 내겐 없었다. 동시다발적인 자유 선언을 접한 나는 이십 년을 근속한 회사에다 미련없이 사표를 내고 낙향했다. 부산에 내려온 첫 날 들른 해운대, 바닷바람이 그렇게 상쾌하고 후련한지 난생 처음 알았다.
부산에 내려와 해후한 김 씨가 운영하는 이발소엘 보름에 한 번 찾는 일이 습관이 됐다. 머리를 깎고 염색하러 가게를 들르지만 실상은 녀석을 만나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게 더 즐거워서다. 희한한 건 녀석이 과거 속 사람들을 호명할 적마다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엉겨 붙어 망각의 마법에 걸렸던 내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경험을 한다는 거였다. 가끔은 아니 들었으면 좋았을 이름도 없지 않았다. 아픈 상처는 차라리 망각 속에 가둬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니까. 허나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김 씨는 그런 내가 가식적이라며 비난했다. 악성종양처럼 평상심을 훼방하는 기억은 하루라도 빨리 제거해야 신상에 이롭다고 했다. 이왕 부산에 눌러앉은 마당이니 바닷물에 훌훌 털어버리라면서. 내가 이발소를 찾을 때마다 김 씨는 무덤덤하지만 결코 거역하지 못하는 위력으로 정아의 근황을 전했던 것이다.
- 월세를 안 받겠다니, 이상하지 않아?
- 아예 안 받겠다는 게 아니잖아. 역병이 사라질 때까지라는 전제를 달았을 텐데.
- 착한 건물주 미담이야 신문이나 TV에서 가끔 들었어. 기존 세입자들한테 월세를 깎아 준다거나 한두 달 면제해 줬다는. 하지만 새로 임차하는 사람한테 월세를 안 받겠다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건물주가 주체할 수 없을 만치 돈이 많은 게 아니면 내가 모르는 하자가 있는 건 아닐까 건물에?
- 그 일대에서 제일 노른자 땅 위에 세워진 건물에 하자는 무슨. 그 건물에 들어 있는 가게들 잘만 장사하더만.
-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제일 비싸다는 건물 1층 일부를 세 놓는데 월세를 안 받겠다니. 보증금도 파격적으로 싸고. 역병이 돌고부터 세입자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고는 해도 말야. 김 씨, 그보다 내가 더 의심스러운 게 뭔 줄 아나?
- 뭘까?
- 하고많은 업종 중에 하필이면 염색방이 아니면 임대를 안 놓겠다는 저의가 뭐냐는 거야. 마치 내가 염색방 차릴 걸 미리 알고서 임대를 놓은 것처럼 말야.
- 건물주가 제 건물에서 편하게 염색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 농담할 기분 아니다.
- 속사정은 들어봐야겠지만 별일이야 있겠니?
- 넌 그 건물주가 염색방만 세 놓겠다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지?
- 정아야, 여기는 이발학원이야. 업계 관련 정보가 모두 모이는 곳이란 말이지. 내가 비록 원장 대리라는 어정쩡한 직함을 달고 있지만 우리 학원생들에게 해를 끼칠 정보를 퍼뜨릴 성싶니? 또 정보의 허실은 그 정보를 구한 사람이 다리품 팔아 직접 살펴봐야겠지만 여태 이 학원 게시판에 붙은 정보로 인생 망쳤다는 소릴 들어본 적 없다. 정 껄쩍지근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계약 해지 하든가.
-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 솔직히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니? 모든 조건이 너한테 이롭잖아. 공실에 들어가니 권리금이라는 것 자체가 없지, 실제 건물주를 확인해서 제대로 계약했으니 보증금 떼일 염려 없고, 역병이 잦아질 때까지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어쨌든 당분간 월세 부담 덜어 좋고. 그러니 너는 장사 잘할 걱정이나 하셔.
-그래도….
그녀가 이용사 자격시험 최종 합격을 통보받고 얼마 안 지난 어느 날 평소처럼 <김 씨네 이발소>를 들른 그는 김 씨에게 은밀하게 임대 조건을 밝혔다. 학원 게시판에는 학원생들의 편의를 돕고자 이런저런 정보들이 달려 있다. 직원 채용, 점포 임대 따위 말이다.
'염색방만 임대 가능. 보증금 ○○○만 원, 월세 면제(단, 현재 유행하는 역병이 종식될 때까지)'
드나드는 학원생들 그 누구한테도 그와 같은 파격적인 임대 조건을 김 씨는 밝히지 않았다. 게시판에 걸어 두지도 않았다. 단 한 사람, 그녀가 가게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밝혔을 때만 거간꾼처럼 그 조건으로 신나게 흥정을 붙인 것 빼곤.
- 건물은 동생 명의로 되어 있지만 지분은 반반이야. 계약서 쓸 때 동생이 나갔지.
- 이제 건물에 번듯한 염색방이 생겼으니 이 누추한 가게는 그만 내방하시겠네.
- 단골한테 말본새하곤. 단골 귀한 줄 모르는 주인 때문에라도 주야장천 올 게다 녀석아.
- 정아, 정말 안 만나볼 거냐?
- 안 만난다.
- 걔가 충격받을까봐?
- 내가 안 만나고 싶어서야.
- 호의를 베푼 것만으로 만족하겠다?
- 너 같으면 호의일까 내 행동이? 걔 입장에선 실연에 대한 복수라고 느끼지 않을까, 자기를 철저하게 비참하게 만드는?
- 그럼 네 의도는 뭐냐?
- 보이지 않는 사랑.
- ?
- 내 의도가 아니라 걔 의도를 충족시켜 준 것 뿐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안 보이는 데서 자기를 지켜봐 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 혹시 신승훈 2집?
- 이런 일로 만나 어색해지는 건 싫어. 또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건 더 싫고. 난 여전히 내 아내를 사랑해. 김 씨, 너는 나를 잘 알잖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어. 내가 안 변한 것처럼 대학생 무렵의 정아를 그대로 품고 사는 게 서로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믿어. 그때 그대로 멈춰진 채로 착각 속에 과거를 가두고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