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헤아리는 마음

by 김대일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완성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넘치는 것은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요.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마침내 자리를 내어줄 때, 사랑은 눈부신 그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요.

- 백수린(소설가), 경향신문 <책 굽는 오븐>, 2018.06.01.


세 여자의 공통된 특징은 단 한 마디 언질도 없이 L 곁을 훌쩍 떠났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남자는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 못하는 그로기 상태에 빠져 허송세월했고 제 청춘의 절반을 허무하게 낭비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앞의 두 여자보다는 경우가 밝았던지 마지막 여자는 행방을 감추기 전 제법 규모가 나가는 카센터를 두 곳이나 운영한다는 돈 많은 홀아비를 지인한테 소개받고 인사치레로 한두 번 만나줬을 뿐인데 자꾸 치근덕거려 성가시다며 L 앞에서 무심한 척 푸념을 늘어 놓음으로써 전조를 알렸다. 미취학 딸애를 둔 돌싱녀가 경제력에 물음표 꼬리가 달린 L보다 돈 많은 홀아비를 만나는 건 대단히 권장할 바이나 연이은 실연으로 인해 이번에야말로 지고지순한 사랑의 해피엔딩을 쟁취하고야 말겠다고 약이 바짝 오른 L로서는 콩트의 한 장면같은 한낱 해프닝으로 치부하면서도 신경이 아니 쓰일 수 없었다.

이수일과 심순애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김중배 다이아 들이밀데끼 돈질로 여자 홀리려는 홀아비 꿍꿍이가 뻔하다면서 대신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억, 조, 경, 해… 돈을 헤아리는 단위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라는 재력보다 위대한 사랑의 힘(power of love)을 목 놓아 불러제꼈건만 평소의 헤실거림은 온데간데없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한 여자였다. 그렇게 마지막 밤은 불통이었다.( L은 그날 밤이 그녀와의 마지막일 줄은 당연히 꿈에도 몰랐다. 다만 밤일 치르고 돌아누운 그녀의 맨어깨가 자꾸 들썩이는 것도 같았지만 그것이 회자정리의 애석함일 줄이야. 둔한 것도 병이다)

여자가 종적을 감춘 뒤 낯설지 않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허우적대던 L 앞에 외제차 딜러인 후배가 나타나 그도 역시 잘 알고 지내던 그 여자한테 고급 승합차를 팔아 실적에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L과의 관계를 알 턱이 없는 후배는 돈 많은 홀아비한테 재가한 덕에 호강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자를 찾아갔다가 월척을 물었다면서 신나게 제 무용담을 씨부렁댔다. L은 차라리 고마웠다. L의 곁을 왜 떠나가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암시적으로나마 밝힌 셈이니 지난 두 여자보다야 이별 매너는 갖췄다고 여겼으니까.

세월이 제법 흘러 L은 매정하게 자신을 떠나버린 여자들을 억하심정보다 쇼윈도 너머 마네킹을 쳐다보듯 직시할 수 있는 냉철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 로맨스그레이가 됐다. 허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망각의 방벽을 뚫고 호수처럼 고요한 심중에 돌연 틈입하면 문득 묻는다. 꼭 그렇게 떠났어야만 했을까? 선뜻 그렇다 라고 대답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대로 사랑에 헌신하고 이별을 감행한다. 그런 상대를 오독한 댓가가 뼈에 사무치지만 절실하게 배운 건 있다.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랑은 깃털보다 가벼운 하찮음이자 쥐어도 쥐어도 흘러내리고 마는 한 줌의 모래일 뿐이라는 걸. 어디 꼭 사랑뿐이겠는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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