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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by 김대일

대학 동기 최가한테서 연락이 온 건 며칠 전이었다. 한때 각별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의 골이 시나브로 벌어지더니 부고가 아니면 그 흔한 안부 전화도 없는 소원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녀석 양친이 돌아가신 지 꽤 되었으니까 격조한 지도 오래다. 역시 대학동기인 이가가 주도해 분기마다 모이던 동기 모임도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최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적이 궁금하면서도 수상쩍었다.

공휴일인 삼일절 오랜만에 동기들끼리 저녁 식사나 갖자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부산 교육계에서 전도유망했던 이가가 속절없이 세상을 뜬 뒤로 구심점이 사라진 동기 모임은 명맥이 끊겼다. 지금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연락조차 어색해진 지경에 이르렀는데 주인공은 파국 직전에 짜잔! 하고 등장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겠다는 듯이 최가가 느닷없이 동기 모임의 선봉에 서겠다길래 반갑기도 하면서 혹시 다른 저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만다. 이 나이에 저의가 있으면 얼마나 대단할 것이며 모르는 것 빼고 다 아는 처지에 동기들한테 농간을 부린다 한들 제 입만 아플 게 뻔한 걸 모를 리 없는 최가다. 무엇보다도 최가란 녀석 자체가 암중모색을 싫어라하는 위인이라서 괜시리 나 혼자서 추리소설 한 편 쓰고 앉았으니 싱거운 웃음이 나올밖에.

대학 남자 동기들 중에서 반지빠르고 영특하기로는 최가만 한 녀석이 없다. 학창 시절 한량도 울고 갈 만큼 음주가무로 놀고먹던 녀석이 책을 파먹자 국어국문학과 91학번 동기 중에 최초로 박사를 땄다. 모시던 지도교수의 뒷배가 상당하다는 후문이어서 내일이라도 당장 모교 전임 강사로 발탁될 기세였지만 거기까지였다. 기약없이 이어지던 고단한 시간 강사의 일상에 지친 녀석은 대학교수의 꿈을 미련없이 접고 십수 년 전 유명 입시학원 일타 강사로 전향했다. 이후로 이가의 장례식에서 김해 어디쯤에 본인이 직접 입시학원을 운영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승승장구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점방을 차려 애면글면하는 깎새 근황을 전혀 모르는 최가한테 마음은 굴뚝이지만 불참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함을 구구절절 대려니 몹시 구차했다. 녀석은 모처럼 제가 앞장서서 깃발을 흔드는 와중에 찬물을 확 끼얹는 내 채신머리를 은근히 나무라는 투로 늦게라도 참석하라며 종용했다. 제 심중에 꽂히면 앞뒤 안 가리는 건 물론 남 사정일랑 안중에도 없는 녀석의 엄부럭은 여전해서 몸뚱아리 굴려 천 원짜리 장사하는 쉰 넘은 동기가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속사정에 별로 귀기울이지 않는 녀석이 살짝 서운하긴 했다.

한창 잘 모일 무렵 집결 장소였던 동래 메가마트 앞에서 내일 오후 4시에 네 명이 모인다는데 나는 참석이 무리다. 아쉽기 그지없지만 학교 선생, 공무원, 학원 원장인 그들과는 달리 블루칼라인 나는 퇴근 후 술 대신 밥을 먹고 잠을 푹 자야지만 다음날 일하는 데 지장이 없다. 내 몫까지 즐겨 주면 나로서는 행복하겠다.

그건 그렇고 최가가 모임을 주선한 이면에 저의가 분명히 도사리고 있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적잖이 궁금했다. 기간제 국어교사에서 해운대구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전향해 과중한 업무로 쌔가 만발이 빠진 김가한테 물어봤다.

"니 갈 끼제?"

"당근. 와?"

"최가 글마 엔간해서는 연락도 안 하던 넘인데, 머가 있는 기 분명하다. 장가가는 거 아이가?"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아이라데."

"아이다. 냄새가 나는 기 먼가가 있어."

"긴지 아인지는 만나 보믄 알 일이고, 최가가 장가간다믄 나만 남는 기네. 아, 외로버서 미치긋다. 얌마, 다리 좀 나바라 어잉? 예전에는 알아서 척척 여자를 소개해주더만 요새는 와 이리 뜸하노. 뜸한 게 아이고 아예 없다이가 어잉?"

"어서 오이소. 야야, 손님 왔다. 담에 통화하자잉."

늦장가 가는 걸 뻐기려고 최가가 대학 동기들을 불러모은 거라면 경사다. 비혼주의자도 아니면서 지지리 궁상은 혼자 다 떨고 자빠진 또다른 노총각 김가가 늦장가 가는 최가한테 자극 받아서 야단법석을 부린다면 그런 금상첨화도 없겠다. 저의가 있다면 제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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