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말수가 별로 없었던 단골이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커트와 염색을 주문할 때는 하대인지 존대인지 분간이 안 갔다. 오고가는 말이 없으니 깎새도 편했다. 제 볼일만 보면 되니까.
그러던 양반이 언젠가부터 말문이 트이자 대놓고 반말지거리인 게 마구발방이 따로 없다. 액면으로 보자면 깎새와 몇 살 벌어지지도 않을 성싶은데 종놈 부리듯 함부로 대한다. 그보다 더 빈정이 상하는 건 물신적 우월감에 젖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황당함이다. 그 근거는 돈이었다.
"야, 이거 해서 한 달에 5백 벌어 가냐?"
자기가 한 달에 5천만 원을 벌든 5억을 벌든 비아냥거리는 듯한 언사는 경우가 아니다. 제 기준에서 한달 수입 5백만 원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하한선일진 모르겠으나 그건 제 기준이지 깎새 기준이 아니다. 5백만 원을 벌지 못하면 인간 취급을 못 받는가? 그리 못 벌어서 인간 같지 않은 깎새한테 커트하고 염색하려고 머리통을 맡기는 자기도 그럼 인간이 아니게?
저 따위 저열한 언행으로 빈축을 사는 돼먹지 않은 인간들은 의외로 많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열외 없이 오로지 '돈'을 기준으로 삼아 인생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물신주의 숭배에 맹목적인 얼간이들.
머리를 깎아 받는 5천 원은 허랑방탕하게 살던 소싯적 5천 원과 질적으로 다르다. 하여 5천 원이 건네는 물질적, 정신적 가치는 그것이 푼돈을 모아 목돈을 만드는 재미를 넘어서 지난 날의 과오를 노동으로써 씻을 수 있는지, 나아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케 하는 계기로써 그 의미가 남다르다. 말하자면 푼돈이 깎새의 사고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깎새도 어차피 맘모니즘 풍조에 휩쓸려 있기는 마찬가지겠지만 5백만 원을 5천 원 취급하는 저급한 치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여 깎새는 우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