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아야 하는데

by 김대일

옷매무새 따위에 신경을 쓰며 멋을 부린다는 의미로 쓰이는 경상도 말은 '깔롱지기다'이다. 그 깔롱을 제대로 지기는 단골이 몇몇 있는데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개인택시 기사가 그 중 한 명이다. 커트 기준선인 가이드라인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추켜올려서 바싹 깎아 달라고 해 단정하고 말쑥하여 빈틈이 없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기에다 점방에서 제일 비싼 염색약으로만 새치 머리를 커버한다. 커트하기는 수월하고 손님도 까탈스럽지 않은 데다가 커트만 하고 가는 손님보다 매상까지 월등하니 깎새 입장에서 보면 그런 호구가 잘 없다. 그랬던 단골이 발길을 뚝 끊은 지 물경 두 달이다.

전라도 곡성이 본향이라던 일흔 넘은 노친네도 일반염색보다 요금이 두 배나 차이 나는 고급염색(그래봐야 15,000원밖에 안 하지만)을 매달 거르지 않던 귀한 단골이었다. 건실한 건설회사를 알차게 꾸리던 중에 십여 년 전부터 몸에 이상을 느껴 정밀검사를 받았더니 폐암 3기래서 그길로 하던 일 다 접고 치료와 요양에만 몰두했댔다. 서울 유수 종합병원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은 덕에 몹쓸 암세포를 없애 버리긴 했지만 재발이 염려스러워 주기적으로 상경해 몸 상태를 체크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행선을 타지 않는 평소에는 친구들과 부산 여러 맛집을 순회하거나 등산이나 여행으로 소일하는 일상을 누리면서 여유로운 노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한번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을 깎새 앞에서 몸소 시현하기까지 했는데, 다름아닌 팁이었다. 볼일 다 마친 노친네가 계산하겠다면서 5만 원짜리 지폐를 건넸고 커트와 염색값을 합한 2만 원을 뺀 3만 원을 거슬러 줬다. 노친네는 거스름돈을 받아서 지갑에 넣는 듯하다가 만 원짜리 한 장을 도로 꺼내 깎새한테 건넸다. 그러고는 "다음달엔 더 잘해 줘잉"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점방 문을 나섰다. 가진 자 특유의 오만함이라고 비꼬기에는 노친네 본새에서 묻어나는 훈훈함이 무척 자연스러워서 살짝 멋있었다. 그 노친네도 뜸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자택이 깎새 점방 부근이라고 했으니 오며 가며 마주칠 법도 한데 종적이 묘연해졌다.

늘 오던 단골이 감감하다는 건 그가 병이 들어 입원 중이거나 더 비관적으로는 죽었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다니던 점방보다 더 싸고 서비스 훌륭한 데를 발견해 전향했거나 세 가지 이유뿐이다. 깎새 입장에서 마지막 이유만은 제발 아니길 바라지만 도처에 깔린 게 커트점이고 미장원이며 이발소니 수틀리면 두말없이 발길을 돌려 버리는 손님 변덕을 막을 길은 없다. 고로 인심 후한 노친네가 뜸한 건 아마 지병이 도져서일 테지만 개인택시 기사의 변심은 결이 좀 다르다. 깎새가 간과했던 건 개인택시 기사는 언제 어느 때고 어디든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기동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몰고 가던 차를 기어이 멈추게 만드는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점방, 이를테면 깎새보다 현저하게 싼 요금을 걸고 손님을 유인한다거나 미모나 몸매가 우월한 것도 모자라 입담까지 걸출한 점방 여주인에 혹한 늙다리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데를 발견하지 말란 법이 없다.

아직도 어리숙한 티를 못 버렸다고 씁쓸하게 웃고 마는 깎새다. 근처 이발소, 커트점 다 다녀봤지만 깎새만큼 커트 기술 좋고 염색 잘하는 기술자를 본 적이 없다는 개인택시 기사 입발림에 놀아난 꼴이 참으로 가소롭다. 평생 단골이란 없으니 손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지 말라는 부친의 말씀에 좀 더 귀기울였어야 했다. 성인군자로 살 게 아니면 세상 너무 순진해서야 득 될 건 없겠다. 약게 사는 법도 호신술처럼 익혀 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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