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다음날은 음력으로 7월 초하루로 내 생일이었다. 평소라면 대충대충 때우고 말 테지만 미역국, 오징어무침, 불고기로 부랴부랴 구색을 갖춘 생일상을 앞에 두고 마누라, 큰딸과 마주앉아 무덤덤하게 저녁을 먹었다. 학교 펜싱 훈련이 끝나자마자 PT란 걸 받으려고 피트니스센터로 직행한 막내딸은 빼고. 일부러 차려 준 성의를 봐서라도 먹긴 했지만 그 일부러 하는 짓이 위선적이라 불편했던 게 솔직한 속내였다. 손수 끓여 먹는 라면이 상투적인 생일상보다 맛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별말 없이 식사를 마친 뒤 양치하고 자러 들어갔다. 그것으로 올해 내 생일의 모든 치레는 막을 내렸다.
물론 그날 아침에 마누라가 10만 원을 송금했다. 생일 선물인 택이다. 재작년 5만 원보다 100% 인상됐다. 요긴하게 쓸 작정이다. 게다가 서울 사는 동우가 기프티콘을 보내 왔다. 며칠 전 골뱅이 파는 술집에서 청승 떨다가 보낸 문자에 생일 운운했더니 녀석이 잊지 않고 보내온 게다. 뜻밖의 선물은 뜻밖의 감동을 선사하는 마력을 지녔다.
작년 생일에는 어땠는지 궁금해 뒤져보니 마침 찾았다. 장난처럼 매일 끼적거리는 글이 쌓이니 일기처럼 곱씹어서 좋다.
집에서는 음력 생일을 쇤다. 음력 7월 초하루, 양력으로 환산하면 올해는 지난달 29일로 그날 식구들이 집에서 조촐하게 생일상을 차려줘 받아 먹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이 나는 성가시다. 일주일 전부터 생일을 의식하는 식구들한테서 배신감 비스무리한 걸 느낀다 중뿔나게도. 생일 시즌에만 잘해 줄 생각 말고 평소에 좀 잘하라고 뿔이 난다. 그렇다고 대놓고 표는 또 못 낸다. 섣불리 드러냈다가는 먹던 생일밥이 언칠지도 모르니까.
나이가 들수록 괜한 생색이나 뻔한 친절이 부담스럽고 마뜩잖다. 차라리 하던 대로 대해 주는 게 더 마음 편하다. 마누라와 큰딸이 생일 저녁 장산역 부근을 돌며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케이크서껀 초밥, 족발을 사다가 생일상이라며 차려줬다. 선물 따위는 없다. 케이크에 꽂은 촛불을 끄는 요식행위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들 식사에만 전념한다. 그러려니 여기며 나도 말없이 코 박고 주린 배를 채울 뿐이다. 작년 이맘때는 마누라가 현금 오만 원을 주면서 퉁쳤다. 그 돈으로 무슨 짓을 하든 간섭 안 한대서 중고책 산다고 다 질러 버렸다. 집에 책 쌓이는 걸 싫어라하는 마누라인데 정말 바가지 한번 긁지 않았다. 생일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솔직히 생일상보다 돈이 낫다. 더 솔직해지자면 그 돈으로 어디 조붓한 선술집에서 혼자만의 만찬을 누리는 게 더 즐겁겠다. 괜한 생색이나 뻔한 친절을 좋아할 나이는 지났으니까. 아무리 식구라고 해도 말이다.
오늘은 주민등록 상의 생일이다. 흔히 양력 생일이라고 일컫는 날인데 마침 점방 휴무일이다. 그렇지만 뻘짓할 새가 없다. 모친은 CT 촬영 후 신경과 외래가 잡혔고 병원 볼일을 끝내면 주간보호센터로 복귀시켜야 해서 몹시 번다할 게다. 그냥 사는 날 중의 하루일 뿐이다 생일은. 내 생일인데도 모친 머릿속을 디다보고 예전에 터졌던 부위에 행여 뒤탈이 생기지나 않았는지 전전긍긍해하는, 뭔가를 기념하기에는 성가시고 가당찮은 날이다 생일은.
생일을 대하는 태도에 달라진 점은 별로 없다. 일전에 강조했지만 생일치레야말로 속절없는 인생을 새삼 확인시키는 고통스런 연례행사일 뿐이다. 생일 즈음해 사람이 울적해진다 싶으면 예의 생일 지랄병이 또 도졌나부다 하고 그냥 내비두면 좋겠다. 그리 해주는 게 마음 편하게 생일을 기념하는 예의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