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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Nov 29. 2023

듣는다는 것

   환자가 "저는 이제 가망이 없는 건가요"라고 물을 때 의료진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일본에서 터미널 케어(말기 암환자처럼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행위)에 종사하는 의료진을 대상으로 행해졌다는데, 의사와 의대생들 대부분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더 용기를 내셔야죠."를, 간호사와 간호학과 학생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란 대답을 택했다고 한다. 특별하게도 정신의학과 전문의들만이 "이제 가망이 없는 건가…그런 기분이 드시나 봐요."란 대답을 택했다는 거다. 환자의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한 무의미한 대응처럼 보이지만 적절한 응답이 될 수 있는 건, 환자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 내 불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고 바로 그것에 확실한 답이 되어 주는 반응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은 내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이 확인되는 순간 환자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듣는다는 행위의 첫 번째 핵심은 듣고 있음을 알려 주는 데 있다며 고통받는 자의 말을 귀담아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감정과 고통의 듣기평가가 필요하다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설파했다. (<신형철의 뉘앙스-감정과 고통의 듣기 평가>, 경향신문, 2021.07.12.)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당신의 말을 듣고 있고 내게 전해졌다"는 어법을 쓰던 때가 있었다. 구청 일자리센터 직업상담사로 관할 고용센터에 6개월 간 파견을 나갔을 때 일이다. 부산 동북 5개 구군을 관할하는 고용센터에서 맡은 업무는 센터를 방문한 구직자와 상담하거나 일자리를 알선하는 거였다.

   고용센터 구직자를 대상으로 한 일자리 상담은 거개가 일회성에 그치지만 그는 보름에 한 번 꼴로 창구를 찾았다. 7년 간 다니던 빌딩 경비원을 막 그만둬서였다. 당시 쉰 아홉이었던 그는 계속 일하고 싶었고 일을 해야만 했다. 실직 이후 밥집을 운영하는 배우자를 돕고 있지만 부부한테는 비효율적이었다. 1+1이 1일 수밖에 없기에 가게보다는 직장을 구하러 밖으로 나도는 일이 더 잦다고 그는 말했다. 슬하에 아들만 둘인데 큰아들은 발달장애를 앓고 있댔다. 가족이 함께 살 수 없어서 발달장애인 시설에 맡긴 뒤 틈이 나면 며칠씩 집으로 데려오는 게 최선이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성치 않은 큰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했다. 그러자면 하루라도 빨리 일터를 잡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겠는데 고용센터 창구에 앉은 당신이라면 이런 내 바람을 잘 알아서 뭔가 좋은 수를 내줄 것만 같다고 고백했다. 

   어수룩하지만 우직해 보이는 그가 창구에 앉을라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눈을 응시하곤 했다. 문해력이 달리는 그를 위해 알아듣기 쉬운 용어를 써서 간단하게 질문한 뒤 어눌한 그가 대답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만약 질문과 대답하는 여건이 여의치 않으면(고용센터 창구는 한 구직자 당 상담에 통상 20~30분이 소요되나 구직자가 붐비면 그 시간은 현저하게 쪼그라든다) 그에게 종이에다 써서 다음 번에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당신의 말과 글은 꼭 듣고 보겠노라 약속하면서.

   그러고 몇 달 뒤 그는 취업에 성공했다. 3교대로 돌아가는 빌딩 경비원직이라고 했다. 내가 그 일자리를 알선해 준 건 아니었다. 그가 직접 다리품 팔아 얻은 일자리였다. 첫 출근 전날 창구를 찾은 그는 고맙다고 했고 다음 번엔 큰아들과 같이 오겠다고도 약속했다. 아빠가 만난 사람을 자랑할 겸. 해준 게 없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자기 말을 들어 주려고 진지하게 대해준 게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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