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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14. 2023

주제파악

   에피파니epiphany는 그리스어로 '드러나다'란 뜻이란다. 원래는 종교적으로 신의 출현, 현현顯現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직관적으로 깨닫는 갑작스러운 진실'이라는 의미로 변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문 칼럼에서 난생처음 접했다. 한겨레신문에서 문화 예술 방면, 특히 문학에 조예가 깊은 최재봉 기자가 기명으로 연재하는 칼럼을 읽다가 제임스 조이스 작품 「애러비」를 언급하는 대목에서였다.

   주인공 소년은 좋아하는 누나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고군분투하지만 바자회가 폐점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사지 못해 절망하던 그때, 바자회의 가게 여자 점원과 신사들이 주고받는 실없는 음담패설을 듣고 전율한다. 세상은 소년의 사랑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소년은 사랑이라는 놀라운 감정의 세계에 처음 눈을 떴지만, 그 앞에 펼쳐진 길은 어둡고 불길할 뿐이다.

   "그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나는 허영심에 내몰리고 조롱당한 짐승 같은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눈은 고뇌와 분노로 이글거렸다."


   사랑의 흥분과 고양감이 급격하게 가라앉으면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환멸을 통한 깨달음과 성장의 이 결말은 '에피파니'라는 개념으로 문학사에 등재됐다.( <최재봉의 탐문-첫사랑>, 한겨레, 2022.07.20.에서)


​   대충 감은 오는데 와닿지가 않아서 그 용어로 다시 검색을 해봤다. 그러다가 철이 한참 지나긴 했어도 에피파니가 뭘 뜻하는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착 감기는 글을 발견했다.


​   즉, 6·25 전쟁이나 나치 홀로코스트를 통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인류애의 소중함을 깨닫는 게 아니라, 저녁 반찬으로 뭘 해먹을까 궁리하다가 쌀통에 쌀이 없는 걸 보고 “아, 내가 쌀도 없는 주제에 반찬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닫는 정도랄까. 물론 이 깨달음은 일상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이제까지의 편견과 무지를 박살낼 정도로 강렬한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아, 내가 가난한 이유는 주제파악을 못해서였구나”까지 깨달음이 확장되어야 에피파니다. 또한 그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아!”보다 더 느닷없는 감탄사 “흐미!” 정도는 붙어야 에피파니다. 

   (…)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구 ‘하이쿠’야말로 에피파니를 위한 에피파니에 의한 에피파니의 시 아니겠는가.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느닷없고 너무 명쾌해서 심지어는 이 지면에도 실을 수 있다. “아이들아, 벼룩 죽이지 마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었으니.” 뭐 이런 식으로 일상의 디테일로 ‘니주’를 깔다가 느닷없이 생로병사의 거대한 주제를 들이미는 “흐미!”스러운 현현.(김선 영화감독, <곡사의 아수라장-갑자기 나타난 노루와 만나다>, 씨네21, 2014.08.22.에서)


​   사소하게 일상적인 사건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에피파니를 '주제파악'으로 바꿔 읽으면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진다. KBS 1TV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초등학교도 아직 안 들어간 소녀소년이 시근이 다 든 애어른 행세를 하던데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야 비로소 사리 분별할 철이 들었다면 그간 얼마나 개차반이었단 말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나이를 허투루 잡순 건 아니라서 무수한 에피파니와 직면하자 세상 무서운 줄 알아 함부로 나대지 않으면서부터 '일상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이제까지의 편견과 무지를 박살낼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살았구나'라는 '그노티 세아우톤(네 자신을 알라)'을 곱씹는 주제파악으로 겸양 모드가 시나브로 몸에 밴다는 점이다.

   혹자는 천날만날 깨우치고 뉘우치면 생불이 다 되었겠다면서 비아냥대겠지만 그러라고 해라. 당장 어제 일(그게 무엇이든)도 낯뜨거워 미칠 지경인데 살아온 지난날을 헤집을수록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이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난들 어쩌랴. 하여 오늘도 멍청하게 무료해질 즈음 뒤통수를 후려갈길 에피파니를 기다리고 또 바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 첫 구절을 이 나이 되어서야 절절하게 이해했다. 미련하고 아둔했던 허위와 위선을 탈피하려는 몸부림, 이게 에피파니가 아니고 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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