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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16. 2023

결국 둘이다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사랑의 불가분성은 집착일 뿐이다. 그 집착이 트라우마를 낳아 스스로를 옭아맨다. 그러니 사랑한다면(혹은 사랑했다면) 떠날 줄도, 놓아줄 줄도 알아야 신간이 편해진다.   

   한때 악몽 때문에 밤잠을 설친 적이 많았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서 누군가를 찾아 헤매던 중이었다. 그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자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하지만 재회도 잠시, 첫사랑 얼굴을 하고 나타난 이가 금세 샐쭉거리고는 휙 뒤돌아서 도망가 버리는 경황 중에 잠이 확 깨버리면 더러운 피곤만 밀려온다.

   좌절된 욕구의 재현을 꿈이라고 한다면 무대가 꿈으로 바뀌었을 뿐 30년 전 실연이 섬뜩하리만치 다시 벌어진 셈이다. 사흘들이로 그런 꿈을 꾸다 보면 혹시 정신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저으기 걱정스럽다가도 혹시 그놈의 빌어먹을 미련이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어서 하다하다 꿈까지 빌어 이리 애를 먹이나 싶어 짐짓 심사가 복잡해지더라.

   허나 이내 가소로워졌다. 설사 미련이 남았다 한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으랴. 첫사랑, 그 말랑말랑한 여운을 쫓는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짓인지쯤 알 만한 나이니까. 그보다는 미련이라는 것도 쌍방향이어야 로맨스든 불륜이든 미련다워지는 거지 일방적이면 반사회적 스토커가 저지르는 추행이나 다름없으니 단작스럽기 짝이 없다.  

   심리학적 현상 중에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는 만약 내가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현실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하는 행위다. 만약 그니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하는 게 그 예가 되겠다. 반사실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집착에서 비롯된 후회를 동반한다. 그때 그렇게 하지(혹은 되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좌절이나 불안감으로 변해 사람 속을 내내 긁어 댄다. 물론 과거 실수로부터 더 나은 의사결정을 깨우칠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심지 약한 인간은 두고두고 가위눌림이나 당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꾸는 악몽은 집착에서 비롯된 미망인 셈인가. 하긴 다시 못 올 첫사랑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아둔한 짓임에는 분명하다.


​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지락至樂>에서)​


​   철학자 강신주는 장자 글에 이런 토를 달았다. 


   장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나라 임금이 누구나 인정할 만큼 새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랑이 끝내는 자신이 사랑하던 새를 죽음으로 이끌고 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어떤 비극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오히려 사랑하는 타자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유로 인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노나라 임금이 사랑하는 새에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 새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결국 우리가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 이학사, 271~273쪽)​


​   집착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종국에는 집착하려 드는 자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역설을 연출한다. 가깝건 멀건 사람 사이 관계는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해야만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건 곧 내 무의식 속 철옹성에 가둬 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미련없이 풀어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속의 잠재된 나의 그니가 아니라 그니로서의 그니로 멀리멀리 달아나게 냅둬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내 원만한 숙면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국 둘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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